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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의 13절을 다시 보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라는 믿음의 사람들의 최종적인 소망과 기대에 관한 고백을 듣게 되는 데 사실 1세기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유일한 소망이 주님의 재림이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의 기대와 현실의 믿음으로 오는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소망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확신을 성경의 마지막 책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했고 이러한 사상은 사도행전 이후의 서신들의 많은 곳에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인사가 “마라나타!” 즉 “주께서 임하십니다!” 라는 격려였다면 어두워 가는 이 역사의 황혼기라고 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신앙적 고백이 되어야만 한다.
요한이 고백하고 있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는 간절한 기대가 요한과 같은 심령과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역시 하늘의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한 탄식과 죄에 대한 슬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실 이 디도서의 대부분이 교회의 질서를 가르치고 다루는 부분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말세적인 경계를 많이 당부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같은 저자인 바울 사도는 옥중서신 중의 한 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고 장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오늘 신앙 하는 사람들의 양태는 여러 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22장에서 세 번씩이나 “내가 속히 오리니” 라는 약속을 반복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2)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
오늘 우리 각자가 이 주님의 약속에 진실되게 반응하는 자세가 곧 각자의 가장 진실한 신앙 상태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마라나타!” 라는 메시지가 별로 격려가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세속화 되어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야 진실된 판단이 될 것이다.
만약에 나 자신이 세상에 너무나 깊숙이 취해 있다면 “주님 조금만 있다 오시면 안되나요? 세상이 너무 좋고 이곳에 쌓아 놓은 것들이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시는 주님의 약속에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 눅12:40)는 경계를 주셨다. 무엇을 예비하라는 말씀인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지않도록 늘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세상에 도취해 있는 모습을 가장 진실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7) 우리 각자가 죄와 상관없이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을 어떤 자세로 맞을 수 있을까? 한번 진실된 판단을 해보고 주님의 재림에 부끄럽지 않는 하늘의 사람들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는 주님 앞에 머뭇거림 없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 라고 고백하며 감격할 수 있는 준비된 …
Ⅰ.주님의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약속이었다.(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흘림으로 이루신 구원을 선물로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 복음의 진수라고 하는 요한복음 3:16~17에서도 이를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를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의 기준이 절대로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9~10) 고 확인해 주고 있다.
오늘 읽었던 바로 뒤인 디도서 3장에서도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4~5) 역시 인간의 기준이나 방법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것은 사람의 조건이나 외모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라운 거저 주어진 은혜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Ⅱ.세상의 것을 버리고 경건한 삶을 당부하셨다.(12, 14)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의 시궁창에서 끄집어내어 주셨다면 다시는 거기에 다시 들어가지 않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공동] [양육하다, 헬, 파이듀오(paideuo), 아이를 훈련시키다, 교육하다, 훈련하다, 채찍질하다(히 12:6); to train, to instruct, correct]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훈련시키기고, 가르치는 이유는 우리의 과거의 세상 삶에서의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불경건, 헬, 아세베이아(asebeia)]; [이 세상 정욕, 헬, 코스미코스(kosmikos] 땅의, 세속의, 부패한 헬, 에피뒤미아(epithymia) (금지된 것을 향한) 동경, 욕망, 갈망 등등]
반대로 점점 많아지고 장성해 져야 될 것들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공동] 우리의 삶의 장소는 바뀌지 않은 이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 살고” 점점 하늘에 익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14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주신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의 비극에 영원히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매어단 이유도 바로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모든 [불법, 헬, 아노미아(anomia)]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모든 법이 아닌 것들에서 우리를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은 “①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②선한 일에 열심 하는 ③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더 이상 과거의 우리의 상태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 그러나 미래의 영광의 백성으로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점점 변화 되어 가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죄와 상관없이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허물없이 서기 위해서 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는 …
Ⅲ.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셨다.(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의 소망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오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복스러운 소망이다. 이것은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영광의 소망으로 듣기만 해도 감격스러운 말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6~27)고 자랑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결정적인 기대와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맞추어져 있고 그 외의 것은 다 부수적인 것들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만이 진정한 소망이요 기대이며 설레임이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올리셨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전에는 안 오셨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삶을 충분히 누리고 이 육신이 낡아서 더 이상 이 땅의 원욕이 그쳤을 때, 그 때 오시는 것을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 “…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세상이 아무리 편리하고 즐거워도 거기에 마음 둘 수 없는 것이 천국 가는 나그네들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신랑의 나타남을 사모하며 자신을 단장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신부처럼 자신을 지키며 기다리는 두 가지에 다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복음 성가 중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
[죄 많은 이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것은 나이든 어른들이나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젊은이든 늙은이든 모두모두의 고대요 희망이어야 한다. 참으로 1세기 때의 교회는 이것 하나로 위로를 삼고 서로에게 격려가 되었다.
감옥에 함께 갇혀있으면서도 이 과제가 격려가 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던 제목이었고, 반면에 주님께 충성치 못한 자들에게도 경계가 되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헬, 마라나타(maranatha!)]”(고전16:22)
1세기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이 오늘 나에게 진정으로 기대와 소망과 기쁨이 되는지 아니면 조금만 지체하셨다가 오시라고 부탁 드리고 싶은가?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주님께서는 다시 이 땅에 오시고, 언제 오실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만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깨어 있는 빛의 자녀들에게는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5:4) 라고 약속하고 있다.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는 당부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주님의 재림과 믿는 사람들의 구원과 관련한 한가지의 경계는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하고 있고 육신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을 바울은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는데 영혼만의 구원이 이 아닌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영혼만이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이 아닌 1세기부터 있었던 영지주의자들의 신앙논리 일뿐이다. 우리의 몸을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고 교훈 할뿐만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는 바울의 당부도 이를 분명히 한다.
바울은 디도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것을 말하고 권면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15)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늘 주지시켜야 하고 이것을 주님의 권위로 권면 할뿐만 아니라 이 가르침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시대에도 주님의 재림을 말하면 비웃는 자들이 있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오늘의 시대에도 이 신앙의 부분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만큼 이 교훈은 중요한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오심에 대한 준비를 시키고 주님의 권위로써 당부하라고 강력한 명령을 듣는다.
주님의 재림이 가볍게 들린다면 회개해야만 한다. 모든 신앙적 초점이 거기에 맞추어져 있는데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복음의 일부를 제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고 당부하고 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는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라는 기쁨과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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