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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증거 한 후에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모르는 모든 이방 사람들의 비참한 죄악의 상태를 거론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의 참혹한 모습[더러움에, 욕심에, 상실한 마음에 내어 버려 두사]을 소개한 후에,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어떠한가를 3:8절까지 논하면서 역시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치 않는다면 그들이 이방인이라 지적하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라는 안타까움을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바울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과 다른 삶을 전시하고 죄로 절망하는 그들에게 생명의 모습을 나타내야 하는 것임에도 옛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진리의 율법을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자부하지만 저들의 삶은 세리와 창기들보다 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늘 말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앞의 1장에서 이방인들의 죄가 짐승과 같은 육체적인 것이었다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죄는 더 깊숙이 감춰진 내적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지적하셨고(마5:28)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요한 사도를 통해서 지적하신 바 있다.
오늘 범죄 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난 후의 사람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나 사랑의 모습, 그리고 긍휼과 용서의 모습은 다 소멸되어 버리고 희미한데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심판의 모습은 잃지 않고 있어서 곧잘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는 빠르다.
이것이 사탄이 이브에게 약속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말의 사실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과 같아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구 사탄의 성품을 본받게 되었는데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성의 정죄는 하나님 보다 더 강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또 이런 사랑이 함께 하지 않는 심판이나 정죄는 어쩌면 마귀가 가장 쉽게 사용하는 모습들이 역사 속에 흔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오늘 본문의 지적처럼 자신도 지적 받을 행동들을 하면서 같은 것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면서 자신은 그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고 정당화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사죄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적 자부심을 가지고 살면서도 우리가 불신자들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욕을 끼치는, 삶에 변화가 없다면 역시 바울의 지적처럼 상급을 쌓는 것 보다는 진노를 샇을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는 만인이 다 공평하다. 약속의 민족으로 낳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봐 주실 이유는 없다. 다만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약속을 안다고 하는 것 뿐이다. 선택된 백성의 특권인 진리의 말씀과 약속을 불순종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큰 진노를 쌓을 수도 있다. 조금 뒤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심판하시고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양심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는 어떤 것도 감춰질 수 없다. 사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현실로 보고 계신 주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은혜의 복음 가운데 산다고 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외면적인 모습에서 불신자들과 다름이 없다면 이 유대인들을 대상해서 증거 하는 바울의 교훈을 통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죄와 상관없이 믿는 자를 구원하러 두 번째 오시는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감격의 고백을 감격으로 드릴 수 있는 …
Ⅰ.남을 판단하면 자신도 그 정죄의 대상에 서 있다.(1~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어찌 보면 신앙 하는 사람들이 가장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다. 자기를 변화 시키지 못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정죄하는 결론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진정한 자유를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으로 그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들어서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을 나의 삶에 동반하는 것이고, 나의 삶을 오히려 그분의 약속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럴 때 진정한 앎이 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판단 받을 필요가 없는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 바울은 이미 앞에서 모든 이방 즉, 불신의 사람들의 죄를 지적한 후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을 짐승처럼 취급하고 판단하면서 삶에 있어서는 이방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것이 바로 자신을 정죄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쓰인 판단과 정죄의 낱말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판단, 헬, 크리노(krino), 판결하다, 간주하다, 고소하다, 정하다, 심문하다; 헬, 카타크리노(katakrino), 판결하다, 정죄하다, 선고하다; 헬, 디아크리노(diakrino), 구별하다, 분별하다, 식별하다,]
물론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을 구체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은 판단의 기준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더 맹목적이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심각하냐 하면 바로 그 율법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을 때 그 주님까지 정죄하고 판단하려 들었던 것 때문에 주님께 마귀의 자식이라는 무서운 책망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들도 경계하지 않으면, 성령을 의지하지 않으면 같은 독선을 행할 수 있다. 자신은 진리대로 살지 못하면서 진리대로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늘 말씀을 따른다면 바로 “…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b) 자신이 남을 판단하고 있지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자신이 판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잇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 했는데 이것 역시 판단을 받는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말 함으로서 판단하고 있는 당사자를 향해서 주는 경고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이다. 즉 “진리”대로 전후 좌우를 다 아시고 분석하시는 하나님의 속성대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사람은 바로 알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때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여 거짓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큰소리 쳐보지만, 인간은 거짓되고 모순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모순까지도 판단하실 분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자신도 상대와 같은 일을 행하면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순을 범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모순이 없으신 진리대로 사실대로 그 모순된 판단을 행하고 있는 자를 판단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 이 말씀은 1~2절의 말씀을 부연설명(敷衍說明)하고 있다.
“…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b)[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헬, 로기조마이(logizomai), 계산하다, 짐작하다, 헤아리다, 추리하다.]” 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위험과 모순은 스스로 하나님의 판단을 앞 질어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거야!’ 한마디로 하나님의 머리 위에 올라 앉아 하나님께서 내리실 판단과 심판을 앞질러 모두 결말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닌 진리대로 약속대로 말씀대로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을 앞서갈 때 그런 일을 당하는 부모들은 대단히 기분 나빠한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자식간에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짓들을 하나님께 하고 있으니 모순일 수밖에 없다.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생각이나 짐작은 모순 투성이요, 죄 투성이다. ‘이런 정도는 봐주실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죄를 짖는 담력을 얻어가고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을 가르치려 들 수 있다는 경계이다.
Ⅱ.이런 행동은 결국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것들을 멸시하는 것이다.(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앞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 라고 경계했는데 이러한 자세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루신 주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과 저주의 죄의 자리에서 우기가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보다 선해서도 아닌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우리의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기도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해결 받을 수 있는 엄청난 복을 받은 원인이 오로지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하였는데 여전히 과거의 죄의 자리에 있을 때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성품을 본받기 보다는 옆의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하고 멸시하는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주고 주어도 그 은혜를 멸시하고 헛되게 하는 것을 지금까지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고 받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우리를 보시면서 주님은 지금도 안타까워 하실 것이다. “너를 그렇게 살게 하려고 내가 그 십자가의 수치와 모멸과 고통을 참았단 말이냐?” “이제는 성숙할 때도 되었는데, 이제는 자랄 때도 되었건 만은…!” 우리의 유치한 모습을 보시며 탄식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들리는 듯 하다.
하나님의 인자 하심과 우리를 끊임없이 회개로 인도 하심과 용납 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끝없이 풍성하시지만 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멸시한다면 마침내는 사랑이 변하여 저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경계를 주고 있다.
Ⅲ.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진노만 쌓게 된다고 지적한다.(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으신다. 복음아래 하나님은 모두를 공평으로 사랑하신다. 이스라엘도 헬라인도 자유인도 노예도 남자나 여자도 공평하신 사랑으로 부르실 뿐이다.
하나님은 끝없는 인내로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시고 받으시고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참지 못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루는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이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15:23f)고 선언 하신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 하시는 것이 바로 고집[고집, 헬, 스클레로테스(sklerotes), 무감각, 완고함, 굳음-마13:4 길가와 같이 굳어진 마음]이요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이다. 잘못된 것을 돌이키지 않는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다.
주님 앞에 복 받고 사랑 받는 비결은 순순히 부드럽게 순종하면 그만이다. 주님께는 죄가 있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죄를 회개지 못해서 문제이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습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육신적인 죄성을 고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직 온전히 회개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회개는 마음의 탄식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주님께서 싫어 하시는 것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바울이었다. 주님 앞에서 꼿꼿이 고개를 들었던 사울은 완전히 죽고 바울이라는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완전히 돌이킨 모습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를 풍성히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귀하게 쓰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7:12)
하나님은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에 대해서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당장에 형벌하지 않으신다. 물론 과거 구약의 율법 시대 때는 당장에 형벌하시기도 하셨지만 복음 시대에는 진노는 언제나 미뤄 두시고 사랑할 뿐이다.
그러나 진노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진노를 네게 쌓는다” 하셨다. 여기에 “쌓는다[헬, 데사우리조(thesaurizo), 저축하다, 비축하다, 모으다]” 라는 말로 통장에 돈을 저축하듯이 모아 둔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하늘에 상을 저축하는 것이라면 고집 부리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는 진노가 축적되게 되는 것이다. 이왕에 쌓는다면 무엇을 쌓겠는가? 유치한 어린 아이 일지라도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가질 수 있다.
이 말씀은 결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이성적이고 육신적인 변화되지 못한 인간 자체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멸시하는 행위요, 진노만을 쌓는 행위임을 경계로 받아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는 교훈을 경계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사랑하고, 용서하고, 덮어주고, 불쌍히 여기고, 섬기고 충성해서 주님의 희생을 가치 있게 하여 하나님의 큰 상급을 천국에 저축하는 바울 같은 고백을 인생의 마지막 까지도 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도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신30:19~20f) 그러나 여기에 대한 선택은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 각자의 차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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