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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가 고무적이고 격려를 담은 말씀들을 좋아 하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유(類)의 제목을 선택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그러나 절대적인 절망이 없이는 절대적인 소망도 없고 지옥의 참담함을 생각치 못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귀중성도 모른다.
오늘의 제목이야 말로 듣기에도 참담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이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교훈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 믿음 생활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로마서의 내용이 죄로 절규하는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소망을 여는 말씀이다. 사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 조차가 사람들에게 대단히 귀중하다. 평생을 이 귀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리는 가련한 영혼들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영광이요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감격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때로는 가만 두어도 영광이 될 하나님을 우리의 믿음의 부족 때문에 누를 돌려 드리는 수가 많고 참으로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욕을 드리기 더 쉬운 것이 이땅에 사는 오늘의 우리 신앙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니 황송하기 그지없다.
오늘 이 두려운 말씀을 통해서도 깨닫고 경성하여 앞으로는 주님께 모독이 아니라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
Ⅰ.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자랑하면서 자신은 말씀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17~24)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복된 명칭이 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의 삶에 사실 엄청난 영향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고 성경의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다른 종교나 인류의 사람들보다 비교될 수 없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 알고 있는 진리가 오늘 나를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고 천국의 백성다움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라면 나 자신에게도 영적인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까지 모독을 끼칠 수 있다는 경계를 주고 있다.
1.그리스도인의 자체가 세상에서 비교될 없는 영광이다.(17~18)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오늘날 교육자료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탈무드를 유대인들은 예전부터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살았으니 그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신자들이 가지지 않는 기쁨과 평화의 삶을 가진다. 이 행복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온다. 어떻든 주님을 알고 말씀을 알고 은혜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다. 율법 즉, 말씀을 의지하고 자랑하며 교훈을 받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인이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①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이 귀하다. “율법을 의지하며” ②말씀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③주님을 자랑하는 단계는 상당한 믿음이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④늘 하늘의 교훈을 받는 자는 것도 귀한 특권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⑤하나님의 의지를 안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⑥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것도 세상에서 난 죄의 속성으로는 불가능하다.
2.우리가 세상에서도 지도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19~20)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①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들이 되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②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이끌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졌다.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③무지한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역할 한다.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④선생의 자리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 믿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도 다른 이들도 인정하지 않는데 스스로 믿는 것이 문제이다.
3.그럼에도 자신은 그 가르침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문제이다.(21~23)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해서 지혜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가졌다는 진리로 자신을 가르치지 않고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단순히 진리나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은 온전하고 자랑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계에도 예외는 아니다.
4.나로 인해서 하나님이 욕을 들으시는 것이 문제이다.(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겔36:17~23)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온 갓 저주와 고통을 십자가에서 당하심으로 죄에서 사 주셨는데 거기에 대한 감사로 영광을 되돌려 드리기 보다는 오히려 모독을 듣게 해 드려서야 되겠는가!
당시의 유대인들 보다도 이스라엘보다도 바로 나 자신 때문에 불신의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훼방을 받는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점검해야만 한다.
거기에 대한 결과를 연이어 밝힌다.
Ⅱ.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할 것이다.(25~27)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자존심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즉 그들의 이스라엘 사람이냐 아니냐를 가장 구체적으로 구별하는 할례의 문제로 민족의 자존심 조차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우리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신앙의 행위나 기호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인정치 않을 수 있다는 경계이다.
[십자가, 헬, 스타우로스(stauros-<위로 향한> 기둥), - 행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10: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갈3:13;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헬, 크쉴론(chsylon)]
바울은 이 로마서의 축소판이리고 하는 갈라디아 서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세례라는 가장 구체적인 순종의 문제와도 결부 시킬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의 할례와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상징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슷한 것 같지만 구체적인 조건과 효과는 완전히 다르다. [할례≒세례]
오늘 복음 속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가장 구체적인 신앙의 과제인 세례에 조차도 같은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도식은 율법을 행하는 것은 할례를 유효하게 하고 율법을 행치 않는다면 할례는 무 할례와 다름이 없고 오히려 이방인과 차이가 없는 대상으로 하나님은 취급하신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더 과격하게 앞에서 이미 거론한 바 있지만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무 할례자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오히려 할례를 받고 거룩한 문서인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침으로 서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행위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효과를 있게 하고 무효하게 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논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역사, 은혜의 역사 이전의 육신적 이스라엘에게 적용하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겠지만 복음과 세례에다 직접 적용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는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역시 같은 경계는 분명히 가져야만 하는 가르침이다. 또 이런 경계 때문에 세례를 인간의 법으로 기간을 정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에는 인간의 의(義) 즉, 양심의 법이 복음을 들은 자에게 더 이상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혀 행하지 않다가 세상을 떠나거나 주님의 재림을 맞게 된다면 과연 그의 받은 세례가 효력을 가질 것인가 하는 의문은 분명히 남는다.
결국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정확한 판단을 하실 것이고 사람역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신앙하고 사는 것이 더욱 귀중하다는 가르침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는 경계는 분명히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을 대상하기 때문에 우리의 세례만을 의존할 수 없음을 경계로 받아야 한다.
분명히 세례는 죄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골2:12)이요, 구원의 표요(벧전3:21),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예식(갈3:27)이지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온전히 이행하지 않을 때에도 이 약속이 지속적으로 유효한가라는 데는 오늘 본문의 유대인의 할례와 상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Ⅲ.실질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선언하신다.(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마지막 부분의 도식은 한마디로 인간의 보는 눈과 하나님의 보시는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 복음 속에 이 내용은 사실이다. 분명히 육신으로는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났다고 해도 그 보이는 혈통이 곧 하나님의 언약의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에도 자신들은 사생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주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는 다소 과격할 정도의 표현을 쓰고 계신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서 분명 아브라함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닌 것은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39~40)는 가르침 속에서도 분명해 진다.
우리가 행하는 삶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무엇에 속해있는가 즉, 구원에 속해있는가, 혹은 멸망에 속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가도 나타낸다는 내용이다. 마귀의 도구인지, 구원의 주님의 백성인지를 숨길 수 없이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사실이 바로 무엇에 순종하는 가로 증명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주 공과의 첫 부분에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는 그 사람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삶의 결과들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잘 못 믿는다면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바른 행동을 하도록 이끌 것이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분명히 진리이다. 표면적으로 자신이 교회에 들락거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보이는 그 모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숨겨진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사람에게 칭찬을 기대하는 할례 받은 유인들 같은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약속의 민족에게 났기 때문에 유대인이지만, 비록 육신의 혈육으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지 않았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칭찬을 기대하는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한 약속의 대상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바울은 말하고 있다.
오늘도 분명히 표면적인 그리스도인과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혈통의 관계와 완전히 같지 않은 것은, 사람은 그 속에 가진 것을 밖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이러한 언어생활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스스로 세상에 발설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행동역시 숨길 수 없이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표현하게 되어 있다.
분명히 사람의 나타나는 면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 입장에서는 신앙적인 삶의 모습은 삶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교도소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와서 개과천선(改過遷善) 했다고 성경책 들고 교회와 기도원들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여신도들을 성폭행하는 것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도되면서 그리스도인 사회에 충격을 줬지만 그 사람은 사실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우리의 본 모습을 감출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오늘 나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아니면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독을 받으시는가를 분명히 판단하여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는 하늘에 속한 살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나는 표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아시며 자신도 기록된 말씀과 거룩한 성령과 더불어 자신의 양심을 비쳐볼 때 어느 정도는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경계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사람을 의식하며 신앙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만을 의식하고 믿음생활 하는 가가 여기에 대한 바른 응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앙의 삶을 점검해서 이 두 가지의 경계에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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