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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3:1~8 2007-03-04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죄악상을 1장에서 그리고 유대인의 죄를 2장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으로 주님을 모시고 산 유대인의 나은 점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온 인류의 죄를 지적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제시할만한 질문들에 대한 내용과 거기에 대한 영적인 답변을 주고 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것이 전혀 유익이 없다면 인류구원을 위하여 선택된 이스라엘의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그 많은 기적과 능력의 역사를 경험한 것으로 끝이라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12:2~3)는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천국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다만 신앙하는 사람들의 복이 이뿐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자신의 불의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과 위엄성이 더 들어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과연 호소력을 갖는가 하는 것인데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죄악에 대하여 쐐기를 박는 선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시다면 자신의 택한 백성을 불신에 버려 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의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의롭지 못하다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며 그러한 변명은 역시 사악한 인간의 변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조차도 그러한 그러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들은 그러한 거짓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면치 못하리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고 말씀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온전치 못하다면 변명하게 되고 죄를 합리화 하는 같은 죄를 범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손상을 끼칠 수는 없고 다만 범죄 하는 당사자만 비극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고 소신 있는 믿음의 삶을 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죄악 된 세상과 구별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Ⅰ.선택받은 자의 유익.(1~2)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고대 철학에서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방법으로, 대화의 상대자가 스스로 참된 지식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으로 대화법이라고 한다.]은 대단히 유명하다. 바울은 당시 헬라 철학이 추앙 받던 시대에 때로는 철학에 익숙한 일반인들에게 그 철학의 형태를 빌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부분들이 그의 서신들에서 가끔 나타나는 것을 보는데 오늘의 내용이 바로 그런 형식이었다.

앞으로 본문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보겠는데 모두가 질문을 제시하고 거기에 답하는 형식의 대화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앞에서도 지적을 한바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도 죄에 대하여 예외가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상해서도 질문공세를 퍼부었던 유대의 랍비들이 분명히 반론을 제기해 올 것을 알고 있음 직한 질문들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정의로우심을 논증하고 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1)냐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위대한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후예들이란 자긍심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 결코 뒤질 수 없는 것이 유대인들의 자존심이었고 거기에 가장 구체적인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할례였는데 바울은 율법을 행치 않을 경우 이 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익하다는 지적을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론을 이미 수용하며 답하고 있는 것이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 “과연 여러모로 많이 있습니다”[공동]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표준새] 앞에서도 일부분은 말한바 있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면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지 모른다.

바울은 이 로마서에서 자신의 민족의 불신을 탄식하면서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9:4~5) 라고 이방인이 갖지 못한 저들만의 특권을 인정한다.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구원과 상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고 사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크다. 세계의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이 들어감으로 성경이 읽혀지면서 달라지는 면은 눈에 환히 보일 정도이다.

미개한 나라들이 문명화 되는 역사는 가까이는 우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성경이 아닌 다른 신들과 경전들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유치 찬란하다. 성경은 어두운 눈을 띄워주는 하나님의 도구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많은 부분들이 있겠지만 가장 첫째를 꼽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맡았던 바로 그 말씀이 인격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해 버린 것이 저들의 결정적인 실수이긴 하지만 그들이 계시된 말씀을 맡아서 보존해 온 것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역할이고 또 저들의 특권이었다.



Ⅱ.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릴 수 있는가?(3~4)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분명히 믿음의 조상을 따라 믿음의 후손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림으로 이루신 구속의 은총을 불신하는 것이 사람의 보기에 하나님의 한계가 아니냐 하는 투로 들리지만 이 이야기는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둬서 인간으로 범죄 하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는 질문과 꼭 같은 말이다.

약속의 민족으로 택한 이스라엘 속에 불신의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하나님이라면 그의 약속을 어찌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투의 항의이고 결국 선택한 약속의 자녀들이 불신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미쁘심, 헬, 피스티스(pistis)]은 사람의 믿음과 같은 말로 [믿지 아니함]은 단지 이 (피스티스) 앞에 붙은 단어를 부정하는 알파(a)가 붙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 것보다는 그 동안 랍비들을 통해서 해석되고 주석된 말씀을 믿은 것이고 이런 입장에서 분명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라는 저들이 가장 자랑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를 따라 오신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비극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자긍심과 열심은 가졌으되 이러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언약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신들의 만든 기준에서만 열심을 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안타까워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생각의 단순성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흠이 갈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 인류를 복음으로 불러 들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이러한 부분을 뒤에서 밝히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11:25)

“…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b~4) 결국 이 말씀은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시51:4-공동)는 다윗의 고백을 인용한 내용이다.

다윗 같은 위대한 사람이 범죄 하였어도,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게 판결을 내리셔도 하나님의 판단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다는 고백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다윗의 고백이라는 데 더욱 의의가 있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당하는 어떤 불이익이나 고난, 믿는 사람들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심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한 야고보의 의지는 분명하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행여라도 오늘 믿음의 사람들의 타락과 불신이 생기고 또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데도 어려움이 발생할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한 단체가 하나님 앞에 타락하고 믿음에 견고 했던 사람이 그 믿음을 잃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의심 받을 수없다.



Ⅲ.거짓된 말이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가?(5~8)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앞의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3)의 소극적인 자세가 인정된다면 좀더 적극적인 ‘범죄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들어내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이런 질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은 절대로 이렇게 인간적인 상대주의에 의해서 영광을 들어내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나타나는 현상에서 이런 음지와 양지의 변화가 더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장관이 문책을 받아서 장관직을 내어 놓으면 생각지 않고 있었던 어떤 사람은 장관직을 얻는다. 같은 곳에서 함께 장사하던 두 사람이 한 사람이 아파 드러누우므로 나머지 한사람이 갑절을 파는 횡재를 하는 일들은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세상의 상대주의에 하나님은 초월원해 계신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이런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至高至善의 하나님이 시라는 표현을 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나 사람의 주장이나 상태때문에 입장이 달라질 수 없는 분이시다. 바울은 여기에서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자신의 신앙이나 하나님의 진지인 말씀의 가르침이 아니라 당시 흔한 철학적이거나 세상에 흔한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세상의 흐름에 따라 계획을 바꾸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면 사람과 하등 다를 것이 없고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고 경배할 대상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이 역사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다 아시고 이 인류를 구원하실 마스터 플랜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오직 “때가 차매” 즉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간에 따라 계획하신 일들을 인간의 반응에 상관 없이 진행시키시는 분이시다

사실 이랬다저랬다 하는 하나님 이시라면 이 세상의 사람들을 심판하실 수도 없으시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범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유들이 있다. 자기는 범죄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핑계치 못할 절대적인 기준을 만드시고 조건에 상관없이 그 절대적인 기준을 따라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절대적 조건에 살려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이 가능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실지로 이런 안타까운 논리를 펼치면서 변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네가 거짓말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들어 난다면, 나의 범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욱 드러낸다면 죄는 합리화 되고 하나님은 침묵하셔야만 할 것이다.

우리 인간 세계에는 선의(善意) 라는 말이 괴물처럼 쓰인다. ‘선의의 거짓말, 선의의 죄,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그러나 하나님께는 다 어울릴 수 없는 말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짓으로 덕을 보고 부리의 범죄로 영광을 받으실 만큼 허약하지 않으시다.

이제 이 말씀들을 우리 에게 적용할 필요가 잇다. 그런즉 그리스도인의 나음은 무엇이며 세례의 유익은 무엇이뇨, 모든 일에서 많고 첫째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믿음에서 떠나는 불신이 생긴다면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끌어 내리려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거짓말이나 불의한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들어 낸다고 변명하지만 그런 하나님 이시라면 세상을 심판할 자격을 가지지 못했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이나 악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이야 말로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절대적인 이유 때문에 죄는 형벌 받아야 하고 죄인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절대적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예대로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나를 이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