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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상에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처럼 끊임없는 논쟁이 있는데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성선설(性善說-孟子)이냐 성악설(性惡說-荀子)냐 하는 도덕 윤리계나 철학계의 토론을 본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다. 信, 不信을 막론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 역사 속에 최고의 지혜의 사람인 솔로몬을 통하여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한 것 뿐이었고 보시기에 좋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남녀로 지으신 후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31f)는 기록을 봐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 평화롭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최고의 행복의 장소에 죄가 들어옴으로 부터는 아름답던 모든 것들은 일그러지고 평화와 사랑은 사라져 버리고 행복의 에덴에서 쫓겨나 가시와 엉겅퀴의 땅에서 살게 되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이 모든 창조물의 관리자요 대표자로 지음 받은 주인공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본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와에 대한 아담의 사랑의 고백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 하였지만 범죄 한 후의 아담의 졸렬해진 핑계는 역시 같은 아내인 하와를 향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라는 탄식에 가까운 죄의 전가는 사실 두 사람의 일그러진 상태를 보여주는 고백이다.
앞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죄악상을 이미 논고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한 확증 같은 말씀이 오늘 말씀의 첫 절이면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시는 보편적인 모든 인류의 상태이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 이 말씀은 우리가 다음 시간에 다룰 두절의 말씀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방인의 율법은 2:15]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
첫 조상 아담을 조상으로 이 역사 속에 왔다간, 그리고 살고있고 태어날 미래의 역사가 닫힐 때까지의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서 예외가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아무리 화려해도 비극일 뿐이다. 여기서 말을 끝낸다면 절망이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이 인류에 오셨고 마찬가지로 율법아래 오셨지만 그 분은 땅에서 난 분이 아닌 하늘로서 내려 오신자(요3:13) 즉,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모든 땅에서 난 사람들과는 다르고 모든 땅에서 난 자들 즉, 죄 아래, 율법 아래 난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 라고 성경은 확인해 주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도 예외 없이 율법 아래, 죄 아래서 났지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신 자 율법 아래 나셨지만 죄는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저주 아래서 자유케 하셨으므로, 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하고 온전한 방법인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죄의 저주에서 완전히 자유 하게 되는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을 주셨음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이미 이 놀라운 복을 누리는 자들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헤아려 감사하시고,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한 자들은 이 놀라운 약속에 순종하여 죄와 저주, 그리고 심판과는 상관이 없는 천국 백성으로 사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
Ⅰ.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우리가 성경에 보기로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라고 기록되고 있어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는 말씀이 지나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바로 전절에 그 이유를 적고 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즉 노아가 의인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이 시대 속에 사람의 보기에는 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럴 뿐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심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 보다’, ‘또는 모든 사람들 보다’ 라는 기준은 통할 수 없는 기준이다.
욥기서에서 욥의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15:14~16)고 하였고, 같은 친구인 빌닷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4~6)고 고발하고 있다.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다윗의 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 라 했는데 이 내용을 살펴봐도 결론부터 이야기 하는 것이 되겠지만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마지막 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 서두에 나타난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이 한 마디가 사람이 의인일 수 없는 이유를 이미 판가름하고 있다.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면 아무 것도 제대로 된 기준이 없다. 도덕도 윤리도, 철학도 과학도 창조주요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면 기준이 잡히질 않는다.
그런 결과가 결국 사람의 가치를 이성도 없는 짐승의 후예로 격하시키고 스스로 짐승의 후예 아메바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그럴진대 다른 것을 말해서 무엇이겠는가.
결혼도 마찬가지요, 자녀에 대한 가치와 교육도 하나님을 부정해 버린 자리에 남는 것은 이성 없는 짐승의 세계만이 존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요즘 좀 거친 표현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져 버린다.
모든 것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버리는 독선이 되고 만다. 종교도 나만의 득도를 위하고 부모도 재산도 자녀도 결혼도 모두가 무질서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로 인한 사랑과 의와 긍휼과 용서와 은혜를 입게 되므로 모든 것이 감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의 첫 단추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 첫 단추를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14:1)와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는 잘못된 단추 체결이 되면 그 뒤는 단추를 어긋맞게 뀐 옷을 입은 사람 같은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당부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을 위하여 주시는 당부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인류가 다 관계를 갖지 않아도 은혜와 사랑과 진리와 위엄과 영광이 충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라고 다윗은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는 어리석음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믿습니까?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1) 깨달음 즉,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부정해 버렸는데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더 당연한 결과이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은 신을 찾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라는 평가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至高至善의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부정해 버린 사람들의 신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안녕과 복과 영달을 위해서 신이라 이름 붙인 것들을 찾을 뿐이지 참되시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조차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그분을 섬긴다면 주님은 그 영광에 그를 섬기를 자를 기꺼이 참여 시킬 것이지만, 자신이 중심이 된 영광과 복과 같은 이기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우리는 주객전도(主客顚倒) 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특히 신앙에 있어서 귀중한 교훈이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교훈 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귀중한 교훈을 주신 것이다.
꼭 같이 주님은 섬기는 데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영광과 형통을 위하여 초보적인 신앙은 후자이지만 장성한 신앙은 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 치우친다고 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바른 길이 있고 편파심 보다는 공평한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석이라는 것이 있으면 쇠붙이는 모두 좌석에만 붙어 버리고 상대 쪽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술 취한 사람을 보면 계속 기준이 없이 길 양편에 치우치는 것을 본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라고 하는 것이 이 치우치는 것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까지 증거 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2~14)
의인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대속의 은혜로 의(義)를 입혀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Ⅱ.온통 저주와 죽음만이 충만하다.(13~14)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의인이 없는 악인의 세계는 당연히 형벌과 저주가 따르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가 없는 자리에 죽음과 심판의 요소들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말씀역시 구약성경의 인용이다. 13f은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5:9) 라는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뿐이기 때문에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한 것이고 이것은 당연히 중신에 즉, 마음 중심에 가진 악을 토해 내는 것이고, 마치 썩은 시체의 무덤을 열어 놓은 것처럼 죽음의 냄새가 충만하여 괴악하고 역한 냄새만이 가득하고 눈을 들기에도 소름 끼쳐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3b은 시140:3의 말씀의 인용인데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하였는데 내어 뱉는 말마다 섬뜩하여 몸서리 치게 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말은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치명적으로 죽일 수 있는 독사의 독소처럼 사람을 죽이는 말투인 것을 묘사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말끝마다 ‘죽일 놈’이고 저주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창조주를 거역하고 범죄 했던 아담조차도 축복보다는 독소의 말을 내 뱉은 것을 읽게 된다. 앞에서 말한바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내를 자신의 범죄의 원인자로 지적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하였고 다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고 당부함을 듣는다.
14절의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라는 말씀도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시10:7) 라는 말씀의 인용으로 13절의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다. 본래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도록 언어의 복을 주셨는데 근본을 잃어버린 사람은 말의 수단 조차도 역으로 사용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와 세상의 언어 생활에서 일관되지 못함을 야고보는 지적하는 것을 듣는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3:10)
여러분 모두의 입술에는 찬양과 축복이 가득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며 주님의 백성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복된 사람들로 주님 오실 때까지 사시기를 …
Ⅲ.만족과 행복이 없다.(15~17)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외면해 버린 결과가 모든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까지 저주를 가져왔고 삶의 활동반경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데 익숙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무지 행복은 없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이 15~17은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59:7~8) 인용인데 인간의 죄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도 기록된 말씀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더욱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발은 행동의 일반적인 표현인데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15)는 말씀이 원문에서는 “행악하기에 빠르고” 즉 악을 행하는데 빠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죄의 특성이다. 거짓은 거짓을 필요로 하고, 죄는 반드시 죄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죄는 죄를 부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 했을 때 이렇게 죄의 사슬에 얽히지 않기 위해서 빠른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한 것처럼 “모든 불의에서” 계속되는 죄의 종 노릇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엄청난 약속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16) =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죄악의 사상에서 올 수 있는 것은 ‘파멸과 고생’만이 그 삶에 있을 뿐이며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7) 평강의 삶은 고사하고 알지도 못할 정도로 먼 것을 의미한다.
평강은 무엇 보다도 조화를 묘사하고 가장 평화롭고 기쁜 상태 즉, 행복을 의미한다고 볼 때 행복을 갈 구하면서도 하나님과 평화가 행복이고 이웃과 화해가 행복인데 평강의 왕이신 주님을 외면하기 때문에 영원히 멀기만 하다는 비극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모습과 대조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을 야고보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묘사하고 있다.
오늘 이 비극의 원인을 끝에 기록하고 있다고 앞에서도 말했었다. 죄로 인한 비극을 열거한 후에 바울은 그 원인이 바로 이것이라는 투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고 마감하는데 이 말씀은 역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36:1) 라고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결론하고 있다.
이 땅에 의인이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주님 오실 때까지는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겸손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비극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이 비극을 비극으로 두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지만 모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죄를 그냥 죄로 가지고 있는 사람과, 용서 받은 죄인들이 그것이다. 사람이 비록 범죄 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을 지라도 사랑의 하나님은 ‘에덴’보다 더 아름답고 영원한 “Zion”에 들어 갈 수 있는 복된 길을 마련하셨다.
그것이 바로 죄의 저주를 대신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형벌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범죄의 가능성이 없는 우리의 영원한 원수인 마귀 사탄이 범접할 수 없는 시온에 들어가게 하셨다.
죄와 심판의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주님께서는 이제는 그 피를 의지하고 주님을 경외함으로 이 땅에서부터 성령과 함께 천국을 누리는 용서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렇지 않음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간격을 가지고 또 현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고 이웃과도 평화와 감사의 삶을 살게 되는 이 참된 복을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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