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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의로울 수 없으며 거룩한 경전인 율법 조차도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 앞으로 이끄는 역할을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다만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지난 시간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나누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지만 공의로우신 주님의 특성상 절대로 그 죄의 값을 치루지 않고는 죄를 용서하실 수도 해결하실 수도 없으시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하나밖에 없는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할 길도 마련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충족되도록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완성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어낸 사람일지라도 이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닌 까닭에 자랑할 수 없고 오히려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겸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약속으로 비로소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이 사라지고 어떤 대상에게도 특권이 주어지지 않으며 한 아담을 통해서 난 인류가 한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한 가족이 되고 한 혈통이 되는 엄청난 약속을 이루시므로 서 율법은 채워지고 완성되었고 행하는 것마다 죄일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사람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담대히 필요를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다음 시간부터는 가장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할례이전과 할례이후,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철저했던 사실을 확인하며 오늘 우리의 신앙과 대조하고자 한다.
오늘 이 3장의 말미를 통해서 이러한 은혜를 살피면서 율법의 제사의 완성으로서의 예배를 점검하고 보다 합당한 은혜의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매 주님의 날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면하여 우리의 삶을 회복해 가는 교훈들을 나누고자 한다.
Ⅰ.인류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성경에 보면 죄진 인간이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내용들을 레위기에서 읽게 된다. 물론 이것은 동물의 피로 드리는 제사 의례였다. 짐승들로 드려지는 피의 제사는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등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5f) 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화목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가 자신의 죄를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으므로 안수하고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간에 덮인 꺼풀을 단위에 불살라 드리고 짐승의 고기는 부정하지 않은 정결한 제사장들과 함께 규례를 따라서 먹어야 하고 만약에 이 고기를 합당하게 먹지 않으면 그 제사는 열랍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당하게 되어 있는 특별한 제사 의식이다.(레7:15~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제물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고 순종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생명을 위해서는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요한 사도를 통해서도 증거 되고 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셨다고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유월절 양이라고 바울은 증거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유월절의 의미는 생명과 관련되면서 신분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귀중한 은혜의 역사이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유월절 기간에 희생이 되셨고, 애급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세상에서 죄의 종 노릇하던 데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인하여 자유 하여 영원한 약속의 시온을 향해서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거쳐가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놓질 수 없는 공통점 하나는 화목제물이나 유월절 양은 그 제물을 모두 규례를 따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모든 사람을 위한 화목 제물이고 유월절 양이기 때문에 한번으로 드려진 그 영원한 제사를 오늘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확인하는 의식이 바로 ‘완성하신 제사’요, ‘예배’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제사’가 되는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거나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고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오순절 날 이땅에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예배의 주심이 바로 ‘주의 만찬’, 소위 말하는 ‘성찬’이 된 것이다. 비록 로마 카톨릭에 와서 7성사의 하나로 ‘미사’ 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화체설(化體說)’이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말씀중심’의 예배가 주창 되기는 했지만 종교 개혁자들도 ‘성찬’은 예배에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갖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회복’을 부르짖는 마당에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예배의 중심이 되어 왔던 “성찬”을 반드시 회복해야만 한다. 이것은 예배에 있어 선택항목이 아니라 필수항목이요 예배의 중심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교회역사 속에서 약식세례에 반대하여 침례를 주장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은 없었지만 “성찬”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은 있었다.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 흘림이고 그 드려진 제사를 매주 떡과 잔을 들고 직면하면서 매 주간의 삶을 그 주님의 피흘림으로 가치 있게 살겠다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 “성찬”이다. 교회는 모든 것이 다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신앙의 기초가 되는 예배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화목제의 고기를, 유월절 양의 고기를 규례와 격식을 따라 깨끗한 사람들이 정결한 장소에서 먹었다면, 또 그래야 제사가 하나님께 열랍되었다면 오늘 날에도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먹고 마심으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그 희생에 직면 함으로서 매주 경건의 삶을 각오하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사람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 이라는 행위에 참여해야 제사가 받아들여진다는 관례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즙으로 기념함으로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의식이 율법의 완성으로의 예배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의 한심한 자세는 매주 주님의 만찬을 행한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가르침 속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또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면 반드시 주님의 희생의 몸과 살을 기념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할 과제이다.
사도행전 속의 예배에서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20:7f) 라는 예배의 목적을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최후의 유월절 만찬석상에 바울이 없었지만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는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귀중하기 때문에 주는 당부의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5b~2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 제사가 자신의 죄를 위한 희생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자들에게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즉, 지나치신다는 것인데 무조건 지나치시면 그것은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용서하심 때문이고, 이렇게 하심으로 죄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은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대가를 자신의 독생자로 치루셨으므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셨다는 놀라운 약속이다.
Ⅱ.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믿음의 법.(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렇게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리에 모시게 된 복 받은 인생은 그것이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율법을 온전히 지키므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있을 수가 없고 오히려 더욱 겸손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대로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한다.”는 고백을 지속적으로 드리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 뿐이다. “나는 너의 죄의 형벌을 나의 아들에게 대신 짊어지게 했다. 그러므로 다만 너는 이것을 믿고 받아 드려라!” 나의 행한 것은 죄뿐인데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법으로 죄를 나 자신이 감당하지 아니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감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랑은 있을 수가 없고 자랑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모멸과 수치를, 저주와 고통을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도가 전도가 아니라 오직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은혜를 받은 자일수록 그리스도의 행하신 아름다운 일은 나를 위한 사랑의 역사를 십자가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도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롬12:3f) 라고 자신이 은혜 받은 자임을 고백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가장 약해질 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오늘도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사악한 인간성이 드러나면 실패할 수 밖에 없고 나는 매주 매주마다 주님의 나를 위해 희생의 피를 흘리시고 수욕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직면하는 예배를 통해서, 또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나를 죽여가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키워가는 것이 경건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 하였는데 오늘도 나 자신이 ‘그래 율법을 좀더 잘 지켜보자, 좀더 도덕적으로 살아보자!’는 각오는 나에게 더욱더 절망을 가져올 뿐이다. 다만 “가치 없는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 수치와 고통을 당했는데…!” 라는 고백으로 나를 부인하고 죄 덩어리인 나를 맡기고 주님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실 때나 사람들이 볼 때도 하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Ⅲ.구별이 없는 율법의 성취.(29~31)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막연하나마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늘에 계시는 존재로 알고 있던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창조주이시다. 믿음의 위대한 조상인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성경이 아직 들어가기 전의 각 문명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바울은 철학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막연하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보면서 아덴 사람들을 향하여 선언하기를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고 증거하면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17: 24~26) 라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역시 그들에게도 창조 주이심이 분명하고 이 동방의 해 돋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우리의 하나님도 되심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분명히 알지 못했을 분이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부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복음을 구상하시고 진행시키셨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0) 만약에 복음이 율법을 보강한 것, 율법을 고친 것이라면 분명히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에게 더 유리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심이 할례의 언약 이전의 믿음 때문인 것과 또 이제 약속 안에 들어와서 할례의 언약을 자손들에게 이루어 감에 있어서 더욱 인치신 사실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롬4:10~)12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
우리가 맨 첫 부분에서도 생각하였지만 ‘믿음의 법’은 세상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닌 까닭에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결국 인간에게 의를 요구하는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이 정상이다.
죄성 그대로의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었지만,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나 자신의 것으로 믿으므로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되어지고, 한 개인을 위하여 앞으로도 몇 마리의 짐승이 죽임을 당해야 할 지 막연한 제사는 완성이 되고, 율법의 요구는 완전히 이루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들여진 한번의 완전한 제사로 하나님께 흠 없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어떤 신앙적 행위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예배하는 것이 첫째이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는 우리의 신분에 대한 확신과 함께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9) 라고 하여 화목제물을 먹을 자격을 확인해 주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선언한다.
모든 인류의 죄, 오늘 나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안식 후 첫날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율법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관통하는 거룩한 예배이다. 이 놀라운 특권은 세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고 감사하고 겸손해야 할 이유가 된다.
이 비극의 역사 속에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하시고, 그 수많은 짐승의 피를 통해서 죄의 비극을 알게 하신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고, 막연한 짐승의 제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히10:12)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시고 그의 십자가의 희생의 화목제사를 자신의 것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받으셔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채우시고 완성하셨다.
복음 속에 율법을 완성하신 은혜의 역사를 따라서 오늘도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과거에는 거치는 율법이었지만 이제는 날마다 채워지고 완성되는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 복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의 예배와 삶속에 완성되어 가는 역사를 경험하면서 영광의 천국을 고대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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