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롬 4:1~8 2007-04-01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이 4장에서는 믿음의 가장 위대한 조상이요 스승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루게 될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믿음의 선진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 받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같은 믿음의 후예들인 우리 모두에게도 대단히 귀중한 과제이고 모범이다.

인간쪽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은혜를 제외하고는 인정 받을 존재가 없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결국 하나님의 초청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고 응답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 약속을 바울은 아브라함의 행동과 할례와 율법과 비교하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구원을 확인하고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의를 증거하면서도 역시 유대인들의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인 다윗의 고백을 함께 소개하면서 인간의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행복인 사죄에 대한 감격을 인용하고 있다.

사람이 의를 힘입는 문제 역시도 사람의 감정이나 이성적인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확신할 필요가 있음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의 감정이나 지식의 부분인 이성의 인식에 의해서 구원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논한다면 끝없이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우리의 지성이나 이성을 의지한다면 사람마다 간격과 차이가 있고 이성을 키워온 조건이나 배경들에 의해서 상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준이 분명하지 못하고 사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밝은 학문이라고 추앙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변천을 거듭해온 철학의 역사를 봐도 가히 짐작이 되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람의 영역인 수시로 변화를 나타내는 감정은 더욱 신뢰할 것이 못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혼란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감정적인 영역을 중시하는 신앙이다. 이성적인 신앙이 차갑고 냉정하다면 감정은 가장 굴곡이 심한 부분이다.

이런 모든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이든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가 최종적인 결론이다. 비록 우리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고 감정으로 용납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주님의 백성들의 삶의 헌장인 것은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기록된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에도 우리는 쉽게 기적과 치료의 역사들을 기준해서 어떤 사람이나 일들을 판단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그 기적은 뭐냐?” 라고 고무되지만 기적을 기준해서 판단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기적은 다만 성경 속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는 마귀 사탄의 일을 보면서도 어두움의 세력이 가장하는 기적 때문에 냉정한 판단을 보류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만약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에서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가 가장 정확한 판단의 기준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실 수 없는 분이라고 불신할 수는 없지만 “왜 기적을 보이고 있는가?” 라는 이유가 이해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유없이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신다. 이런 입장에서 기적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타난 표적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라는 관점에서 평가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든 어둠의 역사들을 보면서도 무지하고 관용할 수 있는 위험성은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꿈이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거짓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도적질하고 속이는 거짓 선지자나 제사장들에 대해서 예레미야23:25~40에 두려운 경계를 주고 계심을 읽을 수 있다.

분명한 우리의 모든 믿음의 판단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 또는 감정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하며 순종하는 것이 생명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분명한 약속이다.



Ⅰ.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1~3)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마태는 자신의 민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고 시작하여 육신으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인정하고 그 믿음의 계보를 따라 난 메시야가 바로 예수 이심을 증거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하신 경우를 들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도 마태와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2) 했는데 사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에 그의 모습은 성경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창세기에서는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31~32)

다시 12장에 연결되면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 …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4~5)

이러한 사실을 신약성경에 와서 스데반의 증거를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실들을 창세기에서 보다는 비교적 간략하지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2b~4)

여기서 보는 대로는 아브라함이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이라거나 종교에 심취해서 명상을 한다든가 하는 모습은 성경이 소개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늦게 까지도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 가부장제의 당시의 상황에서 인간적으로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못박는 한마디는, 아브라함의 태생과 주님의 부르심 받기 이전의 모든 상황이 어떻든지 오늘 바울의 선언과 같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3)는 창세기15:6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인용을 듣는다.

이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으로 주님 앞에 부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모형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을 향해서 들어오는 어찌 보면 완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행동의 원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목숨과 인생을 모두 건 도박 만큼이나 위험했음에도 그 모든 행동의 원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신뢰한 믿음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나중에 바울 사도는 다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는 귀중한 말씀을 하고 있다.

사실 믿음의 대상은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의 대상이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막연한 생각으로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움직인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을 것이지만 다음에 연이어 상고할 17에 “…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한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분명한 약속에 견고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브람이 아브라함일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 바탕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인간적인 조건보다는 진리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 큰 영광과 복의 비결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로운 행동이나 인간적인 선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면 그는 분명히 영광스러운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원한 영광의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상고한 바 있지만 성경의 선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하였다. 또 그러한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말씀에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에 인간적인 기준으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었다면 그는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b)는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의 모든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것일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드리겠다는 자세가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야 할 우리의 귀감이요 모범인 것이다.

우리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믿음의 용사로 살아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누리는 …



Ⅱ.어떤 일이나 행동으로 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로 여기신다.(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다시 믿음의 귀중한 원리를 일과 품삯에 비유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4) 사람이 [일, (에르가조마이, ergazomai), 노력하다]을 해서 받는 것이라면 분명히 일의 대가이기 때문에 일하고 받은 것은 선물 즉, 은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 날에도 잘 못 오해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아 보겠다고 하는 시도들을 많이 보는데 이런 것은 신앙에 있어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자세들이다. 가령 하나님의 은사인 ‘방언’이라고 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연습까지 하는 것을 듣는데 그렇게 해서 받은 것이라면 은사가 아니라 바로 품삯이 될 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좀더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이 은혜의 시대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서 그 노력의 대가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은혜 받지 못한 자세일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말씀하신 기록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4~5)

그런 이유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하셨는데 그래서 믿음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수용(受用)’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선언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받아 들여서 나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 (피스티스, pistis), (피스토스, pistos), faith, faithfulness; 설득, 신용, 확신, 신뢰]이란 ‘설득당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설득된 상태’를 의미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5) 이런 내용은 이미 앞에서도 다룬바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여기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반드시 품삯이 연결되어 있는 ‘일을 아니할지라도’라고 하고 나서 연이어지는 내용이 중요하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라는 내용으로 ‘악한 사람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읽기 쉬운]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표준 새]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전제로 하는 약속이다.

이미 모든 인류의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지불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록 경건치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들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대속(代贖)의 은혜역사 없이 이러한 하나님의 수용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의 공로나 의를 내세우려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림으로 드려진 제사가 나의 저주를 위한 것임을 믿고 아무 계산이나 내세움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잔치를 그대로 수용함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넘치도록 누리는 …



Ⅲ.사죄의 은혜보다 더 큰 복은 없다.(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오늘의 마지막 부분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상의 복을 소개하면서 그 감격을 실제적으로 고백하는 다윗의 고백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죄를 용서 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일하고 받는 것은 품삯이지 선물이 아니라고 했었는데, 다윗은 그에게 누구보다도 충성된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데려와서 간음하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충성심으로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있는 우리아를 예루살렘으로 오게 해서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하지만, 오히려 우리아의 충성심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이 만고의 충직한 부하를 가장 결렬한 전쟁터에 들여보내서 적들의 손을 빌어 죽이고 만다.

그 후에 밧세바를 결국 자신의 아내로 데려오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 죄를 지적하자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아름다운 언어와 감격으로 고백하는 사죄의 은혜를 실감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이 다윗의 고백은 비록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지만 대단히 복음적이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진 사람이 죄의 대가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정죄를 당하지 않고 그 수치를 가리움 받은 것이 자신의 죄 값을 치루지 않고 그렇게 된 것에 대한 감격스러운 고백이다. 특히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했는데 수치를 가장 빨리 없애 는 방법은 그것을 덮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고 약속하셨다.

결국 모든 인류의 죄의 수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의의 옷으로 가리워지고 도발되어서 이제는 양털처럼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을 닮는 경건이 자라어 나오게 된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8) 우리의 죄대로 대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역사를 나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믿고 순종할 때 그 죄는 더 이상 나의 형벌의 대상이 아닌 용서를 누리게 됨을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에 대한 약속을 분명히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나의 어떤 의로움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와 긍휼 때문이다.

계시록 20:12~15에서처럼 최후에 심판의 자리에서 책에 기록된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데, 당연히 저주 받을 죄를 나에게서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로 옮김으로 더 이상 저주와 관련이 없는 자유인이 된 감격, 그것은 아마도 다윗처럼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괴로워서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밤을 지내고 눈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수치심으로 태양을 볼 수 없었다가 그 무지막지한 죄를 용서 받은 확신을 선지자로 통해서 들은 경험을 하고서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 후부터 지금까지 다윗과 같은 감격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속되는 감격의 물줄기이다.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상태의 점검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다. 다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가 최종적인 결론이다.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감격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인간 됨이나 의로움이나 가진 것이나 충성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같은 믿음 때문이다.

우리가 거저 용서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소망을 잃지 않는 것 역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 뿐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은혜가 끊임없이 은혜로 나타날 것이고 조금이라도 나의 공적이나 일한 것을 내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좇아서 신앙 하는 사람이라면 이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영원히 저주받을 죄인으로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고, 하나님께 정죄를 당치 않은”(시32:1~2) 복이라는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은 유도해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의식이든 무의식 중에서도 튀어 나올 수 있는 참으로 하나님께 은혜 받은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마음의 간사함이 없이 즉, 계산됨이 없이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자연스럽게 또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만고에 복된 사람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