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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4:9~16 2007-04-08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바울은 다윗이 고백한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7~8)는 사죄의 감격을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예들을 다시 이야기 하면서 그러한 은혜가 할례라는 의식을 통해서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였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유대인들의 세계에서 대단히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의 신앙의 표는 하나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율법은 사실 아브라함이 족장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국가가 되어 애급을 벗어 나와서 홍해를 건넜을 때 시내산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할례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아담 이후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계속 족장형태로 가족들을 통해서 있었고 하나님은 족장시대가 마무리 되고 나서야 비로소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기 때문에 사실은 율법보다 오래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믿음의 관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담과의 선악과 언약도 복잡한 율법의 언약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 였었고 이 지구전체의 홍수에서도 살아난 위대한 영웅이었던 노아도 믿음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순종한 족장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처음부터 의도된 법이 아니었고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는 사실이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사에 인류가 등장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효한 언약은 믿음의 언약이고 사실 율법 조차도 집대성된 신명기 서를 보면 또 다른 믿음의 법이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28:2)

사실 순종은 신뢰와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은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신30:2~3) 라는 약속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66권인 성경 자체가 믿음을 요구하고 거기에 따르는 순종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이 혼란의 시대에 또 다시 갖는 경계는 머리로만 듣고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들은 바 말씀을 삶 속에 즐겨 순종해야 하나님의 약속도 구체적인 복으로 순종자의 복이 된다는 사실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자부심에서 끝난다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책망 밖에 남을 것이 없을 것이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9~20)는 약속은 몇 천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Ⅰ.아브라함의 의는 할례의 언약 이전에 받은 약속이다.(9~12)

(9)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11)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3)는 말씀은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9b) 그런데 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신 시점을 두고 바울은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9f) 라고 붇고 나서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10)고 증거 함으로서 이스라엘이 그만큼 자랑하는 할례가 결코 아브라함에게 의로움의 조건이 되지 못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고 선언한다.

결국 아브라함이 무할례자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나중 약속의 민족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무할례자로 이스라엘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인하여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꼭 같은 하나님의 백성됨의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귀중한 교훈을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이 (12)에서 더욱 분명해 지고 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는 말씀이다. 이미 전장에서도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30)고 선언 함으로서 결국 복음 속에서 유대인의 특권이 없음을 증거한 바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경계는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복음 속에서의 거듭남을 이 별빛 시대의 논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고(요3:5)

이러한 원리는 당연히 죄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여 세례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에 장사 되고 물에서 일으킴을 받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분명한 원리를 가르쳐 주셨음에도 이러한 약속의 이행 없이도 사람이 거듭날 수 있고 그 거듭남의 인침으로 세례를 준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된 논리의 모델이 바로 이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고린도전서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성령의 감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식하는 것과 중생의 원리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할례자들인 이스라엘의 조상뿐만 아니라 무할례자들인 이방인의 믿음의 조상도 되게 하시려고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12)는 분명한 말씀을 주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할례를 받았다고 큰소리 치는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자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되었다.



Ⅱ.믿음의 법은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이었다.(13~16)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할례보다 약 430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예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3:17~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17:4~6)고 그의 이름을 바꿔 주셨고 이것은 애급에서의 이스라엘 이후 대대로 번창할 믿음이 바탕이 될 믿음의 후예들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에 대한 이유를 역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 고 증거하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유업은 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났고 오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도 이 언약 속에서 계속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3:18)

여기서 계속 거론되는 3가지의 중요한 틀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①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반응하는 ②인간의 믿음과 그 믿음을 보시고 베푸시는 ③하나님의 은혜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이 바탕이고 그 분명한 언약에 반응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 언약은 무위로 끝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약속에 믿음과 신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의 공로나 행위, 업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를 베푸시는 역사를 보게 된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모든 과거 현제 미래를 통틀어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복이나 이 땅과 영원한 역사 속에서의 복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시 그 믿음의 반응에 응답하시는 세 가지의 기둥이 이 역사에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루어 내는 엄청난 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을 본다.

외형적으로 설명해서 세가지 단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체이고 사람의 측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전적인 신뢰와 수용이 인간측의 믿음이라면 하나님은 준비하시고 약속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역사의 진행자요 행위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시기 때문에 사람은 하는 역할이 없어도 대단히 중요하다. 심지어 믿음의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 죄악의 세상 속에 이루어 지지 못한다.

왜 사람에게는 오직 믿음만 요구하셨을까? 그것은 죄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적인 역할은 한가지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3:7) 혈육으로 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오늘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귀중한 확인이다.

그래서 과거 아브라함 때나 다윗의 시대나 노아의 시대나 이 죄악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엄청난 복의 통로가 될 사람들을 찾으셨고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죄악의 역사를 마무리하실 계획 속에서 메시야를 계획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토양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인간의 사실적인 모습을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받은 민족이 다른 민족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긴 역사의 목표를 모지 못했기 때문에 버림을 당하고 만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1:9)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14) 분명히 율법보다 믿음의 원리가 먼저 인데도 중간에 더해진 율법이 전체인양 판단한 이스라엘은 율법조차도 역시 믿음의 법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폐하여 질 율법에 너무 자긍심과 생명을 걸었던 것이 문제이고 만약에 중간에 끼어 넣은 율법으로 모든 인류가 의로워지고 복을 누릴 수 있었다면 율법 이전부터 이 역사의 마지막 까지 이 죄악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믿음의 법은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말인데 물론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계획임을 전제로 해서 하는 말이다.

15절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했는데 사실 율법은 잔혹하고 매정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율법 안에서의 용서는 오로지 피를 흘림으로서만 죄는 해결되었고 그것조차도 사실은 인류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위한 피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예표였다. 그래서 바로 뒤이어 오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는 확인이다.

여기서도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 논리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는 말씀이다.[우리 세상의 형법에서도 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제도가 있다.] 죄가 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되를 깨닫는 것이 먼저이다. 이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죄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이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2:14~15)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데도 유대인들은 단순히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을 정죄하는 우를 범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곁에 두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는 독선을 내뱉었다.

오늘 마지막 절은 오늘 말씀의 결론 같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하나님의 은혜는 할례와 율법과 관계없이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