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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4장을 계속 상고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의 그의 행위 때문도 아니고 할례를 인함도 아니며 율법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님을 지난 시간까지 상고했었다.
이제 이 4장에서는 반복되고 있는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3) 거나 “…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9)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밖에 없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우리가 동일하게 인정 받아야 할 믿음의 모범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오늘 4장 말미의 내용들을 통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구약에서는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대상29: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7)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시51:19)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147:11)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1:20), “…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2:22), “…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8)
신약에서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11:6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당부하고 있고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13:16)는 내용도 읽게 된다.
실제로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양 언어들은 우리 동양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수동형이나 명사형태의 말들이 능동이나 동사로 쓰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러한 차이 때문에 어떤 단어들을 이해하는 관점이 본래와는 상당히 다른데 그러한 가장 흔한 예가 [사랑]이라는 낱말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 말로 [사랑]은 명사이며 [하다] 라는 동사를 붙여야 비로소 움직이는 형태의 동사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유형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양인들의 믿음에 대한 관념과 동양인들의 생각이 다른 것이다.
성경 속의 [믿음 - 헬, 페이도(peitho)]은 분명히 동사로 시작되었고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믿음의 역사”(살전1:3)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을 명사로만 알고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동사로서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데 오늘 말하려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합당한 믿음이었다. 그렇다고 믿음이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분명히 하나 밖에 없는데[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문화와 언어의 관습에서 각각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생겼다는 말이다.
오늘 아브라함의 구체적인 믿음을 점검하면서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그것과 같은가를 살펴보면서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바꿔지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
Ⅰ.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믿음은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한 마디로 “생명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
[1]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11:19에서는 이삭을 믿음으로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데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했는데 자신의 말년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고,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 다시 요구 하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군말 없이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만약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번제로 태워 바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이삭을 다시 살려서 되돌려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는 확신으로 주님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내 후손으로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와 아브라함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점일 것이다. 우리는 계속 이러한 부분을 나누게 되겠지만 믿음을 늘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라는 확신은 하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언 하시기를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선언 하셨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 울고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물으셨는데 비록 복음의 빛이 깊이 감춰진 구약의 별빛 같은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벌써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는가?
[2]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말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으로 확신했다는 표현이다.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했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40)는 기록을 읽게 되는데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29)고 말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더 충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 내실 수 있으시지만 부족한 우리를 용납하고 계심을 감사하고 더욱 믿음으로 사는 …
Ⅱ.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믿음이다.(18~19)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1]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18f) 분명한 결과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라기보다는 그냥 기다림이다. 환경적으로나 조건적으로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인데, 다만 그것이 막연한 신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대상이 말한 것이 아니라 생명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 것만 바른 믿음이다.
뻔히 다가오는 일을 기다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아브라함은 환경적으로 후손을 기다릴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
[2]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믿는 아브라함이었다.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18b) 가장 견고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부도날 이유가 없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판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신앙을 강조하게 되는 데 아브라함은 계시가 흔치 않은 시대에 거짓 계시가 난무하는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었다고 하는 것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자격이다.
[3]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 이것은 적어도 이삭의 탄생에 관한 약속에 관해서다. 한 사람이라도 가능성을 가진 가운데서 그것을 믿었다면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은 속에서 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옛날에 가뭄이 들어 심어둔 벼 모가 타 죽어 버리면 농부들은 거기에서 벼 이삭이 다시 올라오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다른 데 다니면서 심고 남은 벼들을 주어다가 다시 심었었다. 사실 이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이 사람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생명의 주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산능력이 죽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이삭을 받았던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이라는 표현인데 왜 죽었으면 죽었지 [죽은 것 같음]이라고 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판단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가능성이 닫혀버렸어도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판단을 하시기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그의 누이 마르다 까지도 “…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했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11:4)고 말씀하셨던 생명의 주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살아남을 본다.
우리는 쉽게 ‘이제 끝나버렸다!’ “그 사람은 틀렸어!” 하지만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언을 하시지 않으셨으면 다만 ‘죽은 것 같을’ 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선언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너무 판단을 쉽게 내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은 안 되, 다 끝났어!’를 믿음이 있다면 조금은 늦출 필요가 있다. “…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행20:9b~10) 유두고를 살렸다. 오늘 나는 어떤가?
Ⅲ.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졌다.(20~22)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우리는 어떤 일들이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도 그것이 잘 되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확신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세월이 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심을 갖기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이 더 견고해 졌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와 다른 점이었다.
[1]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므로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0) 이런 믿음이라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참소하는 사탄에게 이길 수가 있게 된다.
특히 우리가 가진 것들을 점점 잃게 될 때 믿음이 더 견고해 진다고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의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현상이고 이런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참소하던 사탄이 수치를 당하고 하나님을 대항할 수 없게 된다.
욥이 당한 경우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였다.
“…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1:9~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인 욥이었기 대문에 오히려 사탄이 얼굴이 뜨뜻해 졌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2:4~5) 라고 했다가 역시 참패를 당하는 사탄을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도 믿음이 더욱 견고하여 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여 지지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음을 기억하자.
[2]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이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21) 앞에서부터 연결되어지는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님이시오, 창조주가 되시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말씀하신 대로 믿고 모든 약속이 죽어버린 것 같아도 믿음이 약해 지지 않은 사람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에나 우리 각 개인에게 있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잃지 말아야 영적으로 바로 서서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변하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든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 줄 확신하는 아브라함의 후예다운 믿음을 가지는 …
Ⅳ.오늘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오늘 우리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
[1]아브라함을 자랑하려는 것 보다도 우리가 같은 복을 받게 하시려고 …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23~24f) 이 말씀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은 바로 같은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되어졌고 누구보다도 오늘 나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적어도 같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다.
베드로 사도도 죄인의 거듭남을 증거 한 후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39) 기록함으로써 오늘 우리에게도 유용한 말씀임을 가르친다. 모든 성경의 기록은 바로 오늘 듣는 우리, 더 정확하게 나로 하여금 믿음의 선진들이 받았던 동일한 복을 받게 하려고 기록된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2]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시고 살아 나셨다.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4b~25)
오늘 아브라함의 가졌던 믿음을 우리에게 소개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증거 하는 이유는 아직 율법이나 복음이 증거 되지 않았고 기록된 성경은 더더욱 없었던 상황에서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의를 위해 부활하신 증거를 본다면 그 때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을 위한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요청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이제 우리 각자의 믿음을 점검할 차례이다. 아브라함은 기록된 성경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창조주로 믿고 그 믿음을 향해 나아갔다. 바랄 수 없는 형편과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들이 전계 되어 가는 조건에서도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생산의 가능성이 다 죽어버린 상황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약속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 이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들을 더 많이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이름에 조차도 비길 수 없으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큰 소리 쳤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과 오늘 우리 각자에게 모범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그보다 더욱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증거를 가진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이 믿음을 향한 도전에 부끄러움이 없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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