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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장에 이어 이 5장의 첫 마디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확증하면서 이 사죄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결과가 왔는가를 다음에 상고하게 될 11절까지 증거 하는데 오늘 다루는 앞부분은 결과부터 말하고 6절부터는 저주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원인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인생에 오는 변화가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데 오늘 본문이 간략하게 나마 이러한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 된 사람들을 믿음을 통해서 의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사죄의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상관없이 그를 바라는 자들을 영원한 왕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인간의 생각으로나 판단으로 헤아릴 수없이 주신 많은 은혜의 복들을 찾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저 이 땅에서는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으로 살다가 죽어 하늘에 가서만 영광과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하나로 힘겹게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늘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저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수없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천국을 누리고 있고 만약에 그 좋은 것들을 잃고 있다면 반드시 찾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다 능력 있는 삶을 사는 …
Ⅰ.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복이다.(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자연 질서와 모든 천체의 은하계나 혹성들은 한결같이 화평 즉, 조화를 이루며 운행되고 있는데 이 우주 가운데 가장 우등한 존재인 사람이 오히려 화평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세상에서 사실 화평치 못한 것보다 불행한 것은 없다. 늘 부조화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은 삶을 늙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물론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인류에 죄가 들어오기 전의 에덴은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완전한 낙원으로 자연과 동물이 서로 화평하게 조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런 평화의 에덴에 사탄의 간계가 들어오고 하나님과 자연과 하모니를 이루던 파라다이스는 닫혀지고 아담과 하와는 투쟁의 장소로 쫓겨나고 다투고 싸우는 부조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시작의 말씀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을 통해서 비로소 이 적개심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음을 본다.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화평이 오게 된 통로를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가 단절되고 그런 결과로 모든 자연과 이웃과의 관계에 금이 가고 오로지 부조화만 존재하던 인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유대인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우월을 내세우며 이방인과 조화하지 못하고 가진 영토의 많고 작음이 힘의 이유로 작용하고, 가진 병기(兵器)의 다수와 우월로 인해서 약소국과 불편하고,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전쟁을 일으키는 요인들이 이 역사에 싸움을 일으킨 이유들이었다.
이런 비극과 절망의 역사에 평화의 대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모든 미움과 저주를 대신 져 주심으로 비로소 평화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을 먼저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종교적 우월성을 내세워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불화하였던, 유대인들이 신성시 했던 감추어진 지성소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자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닫혀있던 성소가 모든 인류에게 열리게 되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23:45)
히브리서 기자는 이 찢어진 성소의 휘장을 가리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0)고 증거하고 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했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친히 희생해서 찾아 주신 하나님과의 화평을 오늘 여러분은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2.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화평에 제한이 없다는 의미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주인과 평화를 누린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원수가 원수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많은 사람들은 되도록 이면 높은 지위의 인물들과 잘 지내보려고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고 위기나 어려움이 오면 그 높은 지위를 가진 존재를 최대한 이용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 온 우주의 주인이자 운행자이시고 모든 권력의 주관자이신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우리는 없어질 세상 권력에 아부할 필요도 없고 자랑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진 절대적인 권력자이신 하나님과 부자(父子)의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안다면 보다 근원적인 화평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자연과 이웃과 나 자신과도 화평을 이루는 근본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Ⅱ.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는 삶이다.(2~3m)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당부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권면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받은 가장 일반적인 은혜가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떤 조건도 넉넉히 이기며 나아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세상의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누리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요, 엄밀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도 출발은 역시 “그로 말미암아”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다. 이것은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허락된 은혜이다.
1.이미 은혜 속에 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를 받은 것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로 창일하다.
[409:4]“그 차고 넘치는 주의 은혜의 물결, 힘차게 밀려와 내게 만족하오니, 오 할렐루야로 주를 찬송하오니, 내 맘에 기쁨이 항상 충만함이라,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 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행여 찡그리고 계십니까? 주님이 물으십니다. “나는 너의 인생에 기쁨을 찾아 주기 위해서 십자가로 너의 모든 저주를 해결하였다.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하여 찡그리고 있느냐?”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지 않도록 사십시오. 웃음으로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웃음으로 청하는 여러분들의 기도를 주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2.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으로 즐거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최고의 기쁨은 물론 하늘의 예비 된 영광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수고했을지라도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처럼 고백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기대하는 하늘의 것들이 이 세상의 것들과 다름이 없다면 미래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고 까지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최종적인 기대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쁨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을 연명하기 위하여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고 기쁘게 죽었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35)
같은 히브리서 기자는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3~34)고 확신하였고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기쁘게 수용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 12~13)고 베드로 사도도 격려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의 항목이 가능한 것이다.
3.그리스도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좋을 때 즐거워 하는 것은 아무나 가능하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될 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즐거워 하고 신나 한다.
주님께서는 돌 밭과 같은 마음에 말씀을 받은 자를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돌 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라고 신앙의 깊이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결코 불가능함을 말씀하셨다.
다만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강한 소망을 가진 자에게 가능함을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1~22)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는 교회들에게 당부하기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라고 가르쳤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고 간증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환난 중에도 기쁘게 그 환난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늘을 향해 가는 목표로 사는 사람들만 가능하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의 하늘의 영광은 환난과 비례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환난을 기뻐하는 사람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사람들 뿐이다. 오늘 나는 환난을 기뻐하는 사람인가?
Ⅲ.늘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산다.(3f~5)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세상에서도 확실하지 못한 것이지만 어려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시험을 치를 날을 기다리게 된다. 그것은 그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에 비견될 수 없지만 비록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시험을 당당히 통과하고 받을 자격을 기대하면서 인내로 공부하고 그런 훈련을 통해서 점점 높은 고지로 진입하는 소망을 키우는 것이 밤낮을 모르고 시험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유이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하늘의 속한 사람들의 인격은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해가면서 더욱 하늘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간다.
하늘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환난조차도 신앙의 성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소망을 이룬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f~4) 그러면서 바울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고, 오늘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서 동일하게 재현될 수 있는 덕목이다.
세상의 어떤 기대는 기대하던 것 보다도 어긋나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절대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그 이유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을 대상한 것이기 때문이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서 검증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 키워가고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성령께서 이끌어가시기 때문이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소망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자라면 거기에 비례 되게 소망도 충만할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이래저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약의 믿음의 성도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시119:116) 기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영원한 소망이며 사라지지 않을 소망이며 이미 보증 된 소망이다.
이 소망이 더욱 확신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부었다, 헬, 엑케오(ekcheo)]고 하는 것은 “솟아나오다, 쏟아내다” 라는 의미로 충만이 부어줌을 의미하는데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충만한 성령을 설명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같은 동사를 썼다.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2:17~18)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하여 십자가에 쏟아 부으신 아가페의 사랑을 말씀하면서 미래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미 과거 완료형으로 쓰려지고 있다. “부은 바 됨이니”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고 더 확실해 지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 이 은혜를 누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들이다.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두려움과 공포의 삶이 아니라 즐거워 하는 기쁨과 행복의 삶이 보장되었고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뿐 아니라 환난 중에서도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세상의 불신자들을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복을 받았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과연 이미 약속되고 허락된 이 복을 누리고 있는가 확인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밀려와서 과거 우리의 어두웠던 삶을 빛으로 휘감아 버렸다.
기쁨과 소망은 노래를 부르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는 당연히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감격의 찬양을 쏟아내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감격을 충만이 누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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