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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5:6~11 2007-04-29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심으로 …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로 현실에서부터 누리는 복들을 생각했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런 복을 누릴 수 없었던 비극적인 상태와 그 절망을 사람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하시는 사랑의 역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의롭다 함을 얻어 세가지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내용과 대비가 되고 있다. ①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림, ②환난 중에서 조차도 즐거워하는 삶, ③소망을 이루는 삶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은 누리게 된 이유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로 증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은혜를 계속 증거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이유인 우리의 상태를 세 가지의 각각 다른 입장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가나안에는 전혀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을 애급에서 끌고 나오셨고 그들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능력의 권능으로 애급에서 이끌어 내신 사실을 그들에게 기억 나게 하신다. 물론 광야에서 가나안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시켰고 그래도 불가능한 자들은 가려진 것이 출애급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모세 五經과 여호수아에 기록되고 있는 역사라고 한다면, 역시 자격 없는 우리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셔서 하늘의 사람이 되게 하신 신령한 역사가 애급에서의 장자와 유월절 양의 죽음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역사는 과거의 그림자에 비교되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의 죄로 인한 비참한 운명을 은혜와 사랑의 대상으로 바꾸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역사는 늘 되돌아 봄으로서 인간의 생각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본문에서 각각 두절씩 우리의 본질적인 상태와 이러한 사람으로서 바꿀 수 없는 비극을 소망으로 개선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한번의 죽음으로 이루신 완전한 제사를 세 가지 방향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확신과 감사를 가지게 한다.

전체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살피면 인간으로서는 영적인 입장에서 완전히 무능한 상태인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와 창세이후로 어떤 사람도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칠 수 없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와 이런 이유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과 적대적인 사탄의 아래 있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의 상태들을 말씀하고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해결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각각 다른 특징을 말씀하고 있는데 ‘아직 연약하여, 죄인으로 있는’ 모습에 대응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반면에 ‘우리가 원수 된 상황’에는 ‘그 아들의 죽으심’이라는 다른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우리 인간 세상을 잘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역시 우리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성령의 사람 바울을 통한 배려라고 믿어진다.

다음에 다룰 12절 이하에서는 이 역사에 비극을 끌어들인 첫 사람 아담과 이 역사에 완벽한 회복과 소망을 가져오신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 모두의 비극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동으로 완전히 회복되는 극과 극의 운명을 논리적으로 풀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 모든 신앙의 자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못하면 다만 그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판단과 감정으로 일하게 될 것이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심판의 자리에서까지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논쟁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것임을 주님께서 경계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원수의 자리에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 삼으시기 위한 죄의 값을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치르신 놀라운 사랑을 확신하여 오늘 우리의 삶을 그 은혜에 합당하도록 사랑의 자리로 회복해 가는 …



Ⅰ.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6~7)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경건치 않은 자로 살아 온 우리의 상태를 지적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호령하며 지배하고 거부(巨富)가 되고, 자신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여기 ‘연약하다’는 표현이 그런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몇 천년의 역사를 반복하면서 존재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혀져 가고 뒤를 이어 또 그럴싸한 사람이 나타나지만 어느 사람이건 예외 없이 죽음 앞에서는 무능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죽음의 문제가 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저주의 고리를 끊기 위한 역사를 지난 4장 말미에서도 읽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1.죄 아래 있는 사람의 무능력을 지적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6f) 이미 죄 아래 잡혀 고삐에 묵인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가졌다고 하지만 영적인 입장에서는 무능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큰 황소라도 고삐에 묶인 소는 어린아이에게도 이끌릴 수 있는 것처럼 죄의 고삐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엡2:5)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①죄(악)를 대항함에 무능하다. 아무리 선한 의지와 양심으로 나아가고자 해도 죄의 영향력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 선한 쪽으로 가는 것 보다는 악한 죄의 수렁으로 이끌리기 쉬운 것이 죄 아래 난 인생이다.

이래서 바울은 탄식하고 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②의를 행하는데 무능하다. 사람이면 누구나 선하고 의롭게 살고자 결심하고 다짐해 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는 이상은 그러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결심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로마서 7장에 가서 좀더 깊이 다루게 되겠지만 두 구절만 인용을 하면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③스스로를 구원하는데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 가장 큰 인간의 비극이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이고 그리스도의 오시기까지 일반적인 모든 인류의 현실이었다. 어떤 인류 역사의 성현(聖賢)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 비로소 소망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b) ‘기약대로’는 ‘정하신 때’와 같은 의미로, 가장 비슷한 표현이 바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4:4) 이나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라는 표현들에 기록되고 있다.

죄에 대항하는데 무능하고, 의를 행할 힘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긍휼의 제사는 드려진 것이다. “…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b)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채워진 쇠사슬 같은 죄의 고삐는 잘려지고 자유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이 속죄의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비로소 자유 하는 인간이 되게 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2.세상에 있을 수 있는 비유를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물론 이것과 비교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다 오묘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인간 세상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Ⅱ.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만큼 저를 감동시킨 이야기는 아직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는 그대로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 사람의 무능함과 그럼에도 인간 관계 속에 있을 수 있는 두 가지의 경우와는 다른 인간사에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한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그 사랑을 입은 우리가 서로 같은 사랑의 관계를 나눌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1.영원히 영원히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이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십자가에 대속의 희생이 치러지기 전에는 영원히 저주의 운명으로 죄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의 탄식이다. 결국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은 죄의 고삐에 묶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쪽으로는 죄의 형벌의 철망에 갇혀져 버림을 보는 것이다.

2.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데 역시 요한이 이 사실을 잘 증거 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할렐루야!

3.현재와 영원의 구원이 보증 되셨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지난 시간에 우리가 증거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만 있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모든 세상의 죄악된 것들에서 안전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큰 파멸로부터도 안전하다.



Ⅲ.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1~2) 한 것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 10~11절의 결론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고 같은 감격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 세번씩이나 나타나는 “화목”은 원수의 자리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결과이고 위의 두부분 즉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 한 것에 비해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 하여 독특하다.

이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 관계 속의 원한의 관계를 염두에 두시고 주시는 교훈이다.

어두운 속성들의 사람들은 원한도 대물림을 한다.[로미오와(몬테규家) 쥴리엣(캐플릿家)-세익스피어] 원한의 관계를 절대로 단절시키려 하지 않고 대대로 원한은 깊어만 가는 것이 성경 속에서나 역사 속에서 보아오는 사실이다. 자녀들에게 꼭 부모의 원한을 갚을 것을 주문하는 가정들이 많은 희곡들에 주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가문간의 원한은 한 가정이 몰락하고 라야 원수의 관계는 정리될 수 있는데, 조건에 있어서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는 하나님과 사람, 창조자와 피조물, 이런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사죄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만 죄진 인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기만 해도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연약한 죄인으로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의의 광명한 빛이신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 외에는 영적인 면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진노의 심판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선언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간역사는 오로지 하나님을 진노케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삼차에 걸쳐서 증거 한 후에 이제는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했는데 그의 부활을 우리의 구원에 적용하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구원의 논리이다. 앞의 4:25에서 이미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과 함께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의 역사라면 주님은 우리의 의롭다 하심으로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사람의 감격과 삶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우리를 화목시키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쁨의 통로가 되심도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가 마귀의 사슬에 묶여서 죄를 대항하는데 무능하고 의를 행하는데 무능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원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영원히 죄인으로 저주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고 현재와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안에 안전한 보호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우리 자신들 속에서는 가능성이 없었고 다만 하나님의 원수로 살면서 주님을 슬프고 아프게 해 드릴 수 밖에 없는 자리를 역시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풀려나와 화목된 자로서의 평화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영원의 사람들이 되었다.

이 엄청난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매순간 확신해서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는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