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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주와 절망으로 인해서 소망이 없던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마련하셨고,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마다 그 믿음을 인하여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한 인류의 죄의 통로인 아담과 이 아담으로 인하여 어두워진 역사를 빛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 어두움의 심각성을 실감해 보지 못한 사람은 빛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처럼 죄로 인한 고통과 저주의 쓴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은혜의 귀중성도 실감하지 못한다.[만장 굴 세 번의 停電]
여기는 크게는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그 두 인물이 인간역사에 끼친 엄청난 영향을 비교하면서 반복되는 표현이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한 사람으로 인한 엄청난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는 “많은 사람”으로 역시 비교 한다.
먼저 대략 살펴보면 아담은 인류에 죄의 출구를 가져온 대표자이다. ‘아담’이라는 말이 사실 사람이지만 아담은 온 인류를 광명한 빛에서 죄의 동굴로 끌고 들어간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죄의 어두움으로 끌고 들어간 모든 인류를 다시 광명한 생명의 빛으로 나오게 하는 생명의 문임을 지적한다. 감사한 것은 뒤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아담으로 인하여 영혼을 소멸하고 짐승이 된 인류를 모두 구원하고도 남을 구원의 능력이 되신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하여 죽은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살게 되었다는 엄청난 약속이 오늘의 말씀 중에서도 가장 귀한 핵심이다.
세상에서도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게 되는데 가정의 대표자의 역할이 강조되는 이유는 한 가정의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라고 하는 가정의 두 대표자는 전혀 다른 역할을 했음을 본다.
두 군데로 나눠서 생각한다면 12~14절에서는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과, 15~21절에서는 여기에 비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의 범죄와 비교될 수 없는 은혜를 가져오신 것으로 아담의 부정적인 대표와 달리 감격과 기쁨의 이유가 됨을 해설한다. 이 부분을 세가지로 나눠 생각하겠다.
아담으로 인한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종살이를 하다가 이제는 주님의 희생으로 죄의 대가는 완전히 치뤄지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 사실을 증거하고, 이 놀라운 역사는 율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리려 율법은 정죄할 뿐이었지만 주님의 의로우신 한 행동 즉, 십자가의 희생은 이 모든 것을 뒤집고도 남음이 있는 은혜의 역사임을 증거 한다.
오늘날 이 역시 속의 모든 사람은 이 대표되는 한 사람을 따르고 있고 역시 그 결과 또한 이 대표되는 두 사람에게는 비교될 수는 없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끼치게 된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오늘 “나”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오늘 나의 삶이 나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각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이다.
Ⅰ.아담으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죄와 그 결과.(12~14)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본래적으로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한 것처럼 단순한 육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산 영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시는 은혜의 역사를 가리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라고 부활의 소망을 증거 한다.
아담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모든 인류의 첫 조상이었다. 함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꽤임에 빠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말씀을 범하므로 죄를 범하게 되고 육신의 사람이 되어 죽음을 불러 들이고 만다. 한번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는 아담이후의 모든 사람들을 계속 지배하여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게 되는데, 범죄 한 아담 이후에 이러한 비극에서 예외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죄의 노예가 되어 계속해서 죽음에 바쳐지게 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 아담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캄캄한 죄의 동굴에 갇히게 되고 마는데, 여기 중요한 것은 이미 3:23의 말씀에서 읽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 것처럼 여기서도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것이다.
아담은 죄의 출구 즉, 통로가 되었지만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므로,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인간의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연이어지는 말씀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13) 즉 죄는 분명 죄이고 결과를 보면서도 처벌될 법이 만들어 지지 않은 범법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실 현행법에서도 더러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흑삼, 화장실 미끄럼 방지 타일 등등]
그러나 그 죄라고 이름 짖지 않았지만 사실적인 형벌은 있었던 것을 지적하기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14) 라 했는데, 모세까지라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정죄하는 법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사실 이것은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있게 되는 사실이다. 죄는 이름 붙여진 죄뿐 아니라 항목이 분명하지 않은 죄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이미 아담의 범죄 직후에도 주어진 말씀처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아담으로 인류 모두에게 감염된 죄는 아담처럼 한분 여자의 아들을 통해서 해결 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Ⅱ.범죄와 은사의 역사(役事)와 비교.(15~16)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사람 즉, 아담으로 통해서 들어 온 범죄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역사를 비교한다. 마치 아담을 통해서 어둠의 동굴에 모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출구를 통해서 다시 빛으로 나오게 되는데 죄를 끌어들인 아담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 여기 중요한 것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것이다.
여기서도 철저하게 우리 인간의 범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사람의 조건에 관계없는 은혜 즉 전적인 하나님의 은예의 선물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완전이 자의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비극에서 체념하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조건 없는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주시는 사랑의 손길을 붙잡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고백 되는 것은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6)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넘치는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죄지은 대로 처벌한다면 당연히 사망의 저주가 당연하지만 우리의 행위와 그 형벌에 비교될 수 없는 은혜가 부어진 것이다.
마땅히 진노의 대상인 우리에게 우리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고백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증거하고 있다. 이 감격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드릴 수 있는 …
Ⅲ.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사람의 순종의 결과.(17~19)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결국 범죄자에게는 사망이 왕 노릇하여,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종 노릇 할 수 밖에 없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5)
이런 지긋지긋한 죄의 종 노릇에서 자유 한 후에 또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4:8~9)고 탄식하고 있다.
다음에 나누게 되겠지만 바로 뒤에서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고 경계하고 있다.
죄에서 자유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유를 바로 사용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사랑의 하나님께 그리고 그의 가족인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미움과 저주의 죄의 종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거룩한 사랑의 종들이다.
이렇게 된 것을 가리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기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했는데 “한 범죄”와 “의의 한 행동”으로 아담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는 의의 행동이 비교된다.
아담은 결국 하와를 통해서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빌2:6)신 극도의 겸손이 대비된다.
이것은 더 단순하게 표현해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과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비교되는데 그 결과는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과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답이 나왔다. 여기에 나타나는 결과도 역시 대조가 되는데 “된 것”과 “되리라”는 과거와 미래의 시제의 차이다.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는 사울에게 준 권면은 결국 여기서도 진리로 입증되었다.
오늘 우리의 운명도 이 두 낱말에 대한 선택으로 결정된다. ‘순종’과 ‘불순종’이 사람의 운명을 갈라 놓는 엄청난 갈림길이다. 천국과 지옥의 간격은 대단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단순한데 있다.
어리석은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이성과 감정으로 판단해서 맞지 않으면 거절해 버리는 이 두 가지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영원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염두해 둔다면 누구도 불순종에 서지 않을 것이다.
불순종의 길을 달리고 있다면 당장 가장 가까운 인터체인지에서 순종의 길로 들어서야 생명에 다다를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감정의 변화에 상관 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순종만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Ⅳ.은혜로 왕 노릇 하도록 하기위한 나의 역할.(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미 앞의 13절에서도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는 율법의 언급이 있었었고 현재적으로 죄는 분명히 죄이고 결과도 좋지 않은 것이지만 법률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서 단속을 못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죄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 놔도 같은 죄를 반복하는 아이러니를 보이게 되는데, 처벌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별로 범죄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죄를 짓다가 법이 만들어지면 들킬까 봐서 그전보다 더 두려움을 가지고 같은 죄를 반복한다.
사람의 이러한 간교함을 알고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 은혜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성경에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일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다윗을 평가하기를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5)고 기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의롭게 살았다고 큰소리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의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들었다. 자신의 죄의 처절함을 더욱 절감하고 그 엄청난 죄를 용서 받았다는 감격은 평생을 별 굴곡 없이 하나님을 그런대로 섬겨온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감격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b) 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된다면 오히려 이 세상은 더욱 죄의 천지가 될 것이다. 해서 바울은 다음 장을 시작하면서 이 사실에 못을 밖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이것은 물론 우리가 은혜를 더 크게 누리기 위해서 일부러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용서 받은 죄만 돌아봐도 지긋지긋한데 어떻게 거기에 죄를 더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21)
우리는 과거의 죄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즉, 죄를 왕으로 섬기고 살 때 그 결과는 당연히 사망이었고,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도식화 하기를 과거의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상태를 죄가 모든 인류를 죽음의 영토에서 왕 노릇 하는 것으로,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생이라는 영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신하로 왕 노릇 하는 운명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과거 죄가 우리를 종으로 부리고 결과를 사망으로 가게 했다면, 거기에 비교될 수 없는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는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임을 잊지 말고 이 복된 복지의 나라와 권리를 믿음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킴도 우리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분명한 약속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두 가지 대표자를 따르는 것 밖에 없다. 옛 아담이든지 살리는 아담으로 이 땅에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저주의 자리를 대신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또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운명이 판가름 난다면 나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은 참으로 귀중함을 깨닫고 “많은 사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이끄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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