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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6:1~11 2007-05-13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  
우리는 이미 앞장 5:20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는 말씀을 생각했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면 당연히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그리고 중한 죄를 지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바로 1~2절이라고 말씀을 드린바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1~2) 라고 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자연인과 다른 신령한 존재들이 되는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의 부활을 본받아 영원히 살게 된 귀한 역사 즉,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이자 신비를 세례를 통해서 증서하고 있다.

사실 세례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린아이의 장난 정도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데서 대단히 중요한 의식, 성례(聖禮) 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마귀에게 속한 죄의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의식이야 말로 우리 인간사에서 가장 존귀한 의식일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멸망에 속한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약속이야 말로 참으로 귀중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가르치는 교훈의 가장 놓질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들어가게 되는 귀중한 교훈이다.

이 세례를 통한 죽음이야 말로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는 죽음 조차도 복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했는데 이러한 말씀들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꺼이 죽는 것은 영원히 죽지않을 약속을 누리게 하는 감격이다.

오늘 이 말씀은 바울이 부활을 체계적으로 논하는 고린도전서15장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귀중한 죽음과 삶의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저주 받은 인류에 엄청난 복을 끼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으면 영원한 삶이 없다는 영육의 논리를 생각할 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는 말씀을 우리 모두 자신의 말씀으로 누리는 …



Ⅰ.세례로 그리스와 하나됨의 신비를 설명한다.(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 만큼이나 세례의 의미를 분명히 해 주는 교훈도 드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이미 인간의 거듭남을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신바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시고 이것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아멘 아멘” Amen amen lego soi] 즉,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를 거듭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거듭 거듭 말씀 하심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하신다.

여기서 단순히 “거듭 나야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이 ‘물과 성령으로’ 라고 말씀 하신 것이고 사실 이 말씀을 당시의 니고데모 뿐만 아니라 오늘의 많은 신앙 하는 사람들 조차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과 성령으로라는 두 가지의 요소 때문에 이것이 2회적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적인 약속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라는 선언 속에 나타나고, 가장 온전한 모형은 바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의 모습에서 본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라는 사건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3) 했는데 뒤에서 좀더 생각하게 되겠지만 ‘세례’ 라는 말은 ‘세례’ 라는 말과 ‘침례’라는 말로는 표현이 완전치 못하다. 그래서 이 의미를 손상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성경의 용어 그대로 “밥티조[baptivzw]” 라고 그대로 사용한다.

본래적인 의미는 ‘물에 가라앉다’ ‘물에 잠기다[immerse]’ 라는 의미다. 사실 물에 완전히 가라 앉은 사람은 죽게 된다. 무론 이 예식에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는데 바로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행2:38)

복음을 듣고 믿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먼저 되지 않으면 물에 수천 번을 들어갔다 나와도 구원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알고 그것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의지(意志)의 결단과 고백이 가능 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만 죄인이었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을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했는데 바울은 이 로마서에서 세례로 입은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입고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나중에 베드로는 자신의 글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는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세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원리가 있기 때문에 “구원의 표”라고 까지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세례 모형(방법) 오직 하나이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4:5).

세례를 주다 [baptizo (밥티조)] 등의 동사형과 ①[baptisma (밥티스마)] = 담그거나 가라앉은 결과, 담금, 가라앉음, 세례 등의 명사형으로 나타나고 있어 죽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수장된 상태에서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부활의 연합을 의미한다(5).

오늘날 대부분이 행하고 있는 형태가 아니다 : ②붓다, 흘리다, 부어주다, [ekcheo (엑케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18, 33; 딛3:6), 흘리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행22:20; 롬3:15); ③뿌리다, [hrantizo (ㅎ란티조)] =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9:13, 19, 21, 10:22)

세례에 관한한 물을 붓는다거나 뿌리는 형태는 NT 어디를 봐도 없고 특히 교회의 시작과 진행을 증거 하는 사도행전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붓는다” 라는 의미의 [ekcheo (엑케오)]는 “성령”의 부어 주심과 “피”흘림과 함께 사용되고 “뿌리다”라는 의미의 [hrantizo (ㅎ란티조)]도 “피” 뿌림에 만 사용되고 있을 뿐 세례에 사용된 곳은 한 곳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기간 역시 성경에는 명시 되어 있지 않다. 언제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행해졌다. 그것이 비록 밤중이든지 길을 갈 때든지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행해졌다. 물론 성령의 감동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육신적인 귀로만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복음을 듣는다고 해도, 내적인 성령의 감화를 거절하는 완악함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드릴 수 없고, 사람의 심령을 감화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게 하는 성령은 그가 세례 받으므로 인침과 같이 그의 영원에까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가르침보다는 세례를 주는 것이 먼저 이다. 즉, 어두움의 마귀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 먼저이고 가르침은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셨는데 세상에 속한 사람, 죄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가르침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능하고,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승천하시기 전에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f)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세례 이전에 성경이 요구하는 것들이 반드시 이행 되어야 겠지만 이것은 결코 인간의 편리에 의해서 행해져서는 안 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의식임을 명심해야 한다.다.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신 거룩한 의식에서부터 하나님의 명령이 가감된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회복해야 할 행동들이다.



Ⅱ.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하나됨을 말한다.(4~6)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구원의 세례는 물속에 잠겨 죽는 것 즉, 장사 지내는 것이다. 세례는 헬라어로 [baptizo (밥티조)] = 담그다, 가라앉다, 씻다, 세례를 주다 등의 동사형과 [baptisma (밥티스마)] = 담그거나 가라앉은 결과, 담금, 가라앉음, 세례 등의 명사형으로 나타나고 있어 죽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수장된 상태에서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부활의 연합을 의미한다(5).

여기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나의 죽음의 일치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3)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4)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5)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6)

무엇보다도 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지심을 믿고 그 은혜의 희생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3)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나 자신의 죽는 것으로 확신할 필요가 있다. [찬204:3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런 이유에서 아직 내가 살아 있는 한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없음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4) 세례 받음으로 옛 사람을 장례식을 치르는 의식이라고 했다.

요즘 화장이 많이 권장되면서 무덤도 필요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섬뜩한 일이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죽음이 죽음에서 끝난다면 죽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죄와 영원히 결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고 우리 또한 그 십자가에 죽음에 나를 온전히 맡겨서 마귀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한 해방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라는 이유는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라는 이유로 마무리 되고 있다.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죽었음을 기억하자.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 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Ⅲ.그리스도의 부활에 하나됨을 말한다.(7~11)

죽은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그냥 죽은 자는 의롭다 함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의 사죄의 죽음에 일치를 시키는 자 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4:1)는 묘한 당부를 하고 있다. 바울도 고백하기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고 고백한다.

여기 또 하나의 가정이 주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8) 이러한 소망과 기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게 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이미 앞의 4절에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9) 오순절 날에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고 주님의 부활의 승리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10) 주님께서는 여러 번 죽으실 이유가 없으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 여기 또 하나의 우리에게 요청되는 자세가 있다. 특히 “여길지어다!” 한 것인데 우리의 확신이 이만큼 중요하고 필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의 교제에서도 그렇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우리 자신들은 부족한 것 투성이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은혜에 합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지라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라는 자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 불완전한 사람은 보이는 현상과 감정 속에서 방황할 때가 많기 때문에 “여길지어다”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실수와 범죄를 마귀는 절대로 놓치지 않고 참소해 댄다. 그럴 때에도 마귀의 참소에 신경을 쓰는 것 보다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와 거기에 일치된 우리 자신의 확신을 가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참소를 당할 때마다 확신해야 하는 것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라는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다지 부활의 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부활에 대한 확신을 선언 한다. 이만큼 부활은 귀중한데,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함께 죽은 사건이 나에게 있어서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의 죄에 대해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이 오늘 우리 각자에게는 주님께서 최후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명령하신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서 각각의 사람에게 적용이 된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없다면 당연히 부활도 없을 것이다.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만 나타날 수 있는 영광이다. 죄의 수치를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들에게만 영광스러운 부활의 찬란한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