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에서는 우리가 [밥티스마-세례나 침례라는 말로 충분치 못하지만 듣는 분들이 이해가 어려움으로 세례로 쓸 것이다.] 라는 거룩한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하나가 되고 부활에 일치가 되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증거를 했다면, 오늘의 내용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가 사실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함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의 거듭남이 우리의 삶 속에 사실적으로 나타나야 그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에도 역시 확신이 되고 죄와 더불어 살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모습이 확인 되어야 거룩한 지체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령한 교제를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체, mevlo", melos,(13, 19에 각각 2번씩) 몸의 부분]- 한 개인으로 보기 보다는 주님의 몸의 지체로 우리를 다루고 있음을 이해한다. 우리 육신을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은연중에 자기의 소속을 들어내게 되는 것이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느 식당에 종사하는 사람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좋은 회사 사무직에 종사한다고 거드름을 피우다가 친구들하고 잠을 자다가 잠꼬대를 한 것(어서 오십시오, 뭘 드시겠습니까?)으로 들통이 나서 거짓말 한 것이 탄로가 났다는 얘기도 듣는다.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반드시 순종하는 대상에게 종 노릇하게 되어 있다. 16f절에서도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한 것처럼 사람은 자기의 주인을 숨길 수 없고 결국 자신이 순종하고 있는 주인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데 더욱 경계가 되는 것은 운명이 걸린 순종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섬긴 대상에 따라 최종적으로 그 주인의 운명과 같을 수 밖에 없는데 다시 16b절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는 기막힌 결과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오늘 나의 삶의 모습은 영원 속에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의 마지막 23정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결론을 맺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나의 삶에는 천국의 모습이자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제물이 되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모습을 가졌는지 아니면 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죄의 종 노릇하면서 사망과 절망의 냄새를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거기에 우리의 영원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절까지의 말씀은 연결되어지는 말씀이지만 길이나 중요성 때문에 다음 시간과 함께 두 번에 걸쳐서 나누도록 하겠음.
Ⅰ.더 이상 죽은 과거의 삶에 얽매이지 말라!(12~14)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가 지난 주 말씀에서도 생각하였던 것처럼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함께 죽고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외향적인 종교행위로만 있고 거기에 따르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여전히 바뀐 것이 없는 삶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의 순종의 종이라는 사실을 삶 속에서 확인하라는 당부이다. 우리의 자주하는 말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오늘도 ‘그러므로’로 시작되는데 앞의 1~11절의 말씀을 전제로 하는 당부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물속에 잠기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물에서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이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 죄에 대하여 죽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의 주인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이 당연하다.
요즘 지구촌시대가 되다 보니까 국적을 바꾸고 다른 나라로 귀화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은 좀더 살기 좋은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어떤 경우는 목숨을 무릅쓴다. 가장 가까이는 참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북한 난민들’을 본다. 이 사람들이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습성 때문에 우리 나라에 적응하는 것이 실패하고 또 다른 실패를 경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이야기들이다.
결국 민주국가의 경쟁체제 속에서 적응을 못하고 도태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육신에 국한된 삶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고 영적인 것에서도 그렇다는 안타까움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이다.(히9:27) 이것은 영혼이 생명에 호적을 옮겼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비록 죽을 몸일지라도 이제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이다.
그런 구체적인 모습이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라는 것이다. 결국 죽을 육신이 주도하는 삶대로 이끌려 가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요한 사도는 경고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하였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했는데 지체를 두 번씩이나 [병기, 헬, 호플론(hoplon), 도구, 용구, 장비, 특히 공격용 무기]로 비유하고 있다.
다른데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8:12)고 확인해 주고 있다.
꼭 같은 탱크가 평화를 지키는 도구로도 평화로운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누구에 의해서 사용되느냐의 차이이다. 그렇기 대문에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당부하고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바울은 좀더 적극적으로는 당부하시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교회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셨는데 나는 여전히 과거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실감이 안 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약속하신 일이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의 그 약속에 응답하는 자세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 라는 말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우리가 이렇게 증거 하는 이유를 더욱 분명히 확신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는 확신 때문이다. 믿습니까?
그럴 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4) 라는 사실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하는가? 우리를 거듭나게 한 주체가 연약한 사람으로서의 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증거하기를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힘주어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은 다음 장에서도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
그러므로 더 이상 과거의 연약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이 없어서 죄에게 종 노릇하던 자신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당부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래서 앞의 당부는 귀중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 이것은 비단 우리의 삶의 자세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처음에는 ‘여기는 것’이 중요하고 계속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밑으로 우리의 삶의 자리를 옮겼다면, 우리의 호적을 죄와 저주의 세상에서 파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옮겼다면, 더 이상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리 저주의 자리가 아닌 이유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할렐루야!
더 이상 과거의 죄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생명과 영광이 열려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족 시키는 넘어지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멸망시키는 병기가 아니라 생명의 도구로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역할 하는 …
Ⅱ.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다.(15~16)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부분의 말씀들이 잘 들으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들이고 가볍게 들으면 별로 재미가 없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들을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계속 이야기 해 오고 있지만 우리가 저주아래 있다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어 축복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저주에서 풀려났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선물에 의한 것이라면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고약한 우리 인생은 늘 그렇지 못해서 주님을 안타깝게 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5)
이미 이 육장을 시작하면서도 같은 말을 한바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1) 사람들은 죄에서 자유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비극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다시 비극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들은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자유의 사용에 대한 경계를 주는 부분들이 많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경고하고 나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고 당부한다.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고 경고하고 나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사용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자유]라는 것이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지게 되면 오히려 자신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베드로 사도도 이 자유에 대한 사용을 자제 시키고 있는데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남들이 나를 보고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들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판단이다. 나는 지금, 그리고 가장 흔하게 누구의 종 노릇을 하고 있는가 바르게 판단해야만 한다. 그래야 사망에 이르는 절망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말씀하셨다.
특히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판단이다. ‘나는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 곧 나의 갈 길을 결정하고 있고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한 것이다. 여기에 대칭이 되는 모양이다.
여기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죄의 종’-‘순종의 종’ 그리고 ‘사망에 이르고’-‘의에 이르느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로는 ‘罪의 종’-‘義의 종’ 그리고 ‘사망에 이르고’-‘생명에 이르느니라’ 해야 일반적일 텐데 이런 특이한 도식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죄의 종’이란 그대로 ‘불순종의 종’이고 이런 입장에서 ‘순종의 종’이 대비가 된 것이고 ‘죄’는 즉, ‘불순종’이라는 에덴에서부터 상속되어온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가장 무서운 죄이고 그것을 회개하면 당연히 순종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망에 이르고’-‘의에 이르느니라’는 것이 비교되는 원리도 다르지 않다. 사망에 이르는 것이 죄의 결과라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의를 입게 되고 의는 곧 그 마지막이 생명이라는 데서 다르지 않다. 그런 이유에서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는 비교는 당연히 맞는 이론이다.
다음 주에 이 6장의 마지막을 보겠지만 이 16절의 해설 같은 결론을 주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는 부정적인 말 자체가 필요치 않다.
이런 내용들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노먼 빈센트 필-뉴욕의 이용사 모임]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거나 과거의 습성에 얽매이기 보다는 거듭난 자에게 부어주신 성령을 의지하고 더 이상 죄에게 종 노릇하지 말아야 한다.
이달의 말씀을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우리의 이해하고 생각하는 범위에까지 과거의 습성을 버리고 새로워질 필요가 있고 이것은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이기 때문에 순종만 하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