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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7:1~6 2007-06-03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우리 신앙 안에 사는 사람들이 대개의 경우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둘의 적용 사이에서 혼란하고 어떤 경우에는 복음 속에 산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부분들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옛 언약이 오늘의 복음 속에서도 여전히 지켜야 할 동일한 법으로 이해하고 구약과 신약의 율법과 복음을 적당히 융합해서 신앙 하는 어정쩡한 사람들을 더러 보는 데 이것은 엄밀하게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올 수 있는 모습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

요즘도 구약의 절기들이나 명칭들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직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한 모습이요, 은혜보다는 법에 얽매이는 삶에 있는 모습일 것이다. 법률은 개정되었고 공포되었으며 자유는 선언 되었다.

지난 6장에서 주종(主從)의 관계로 이해되던 관계는 좀더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인 부부의 관계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예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신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표현 한 곳은 많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사54:5f)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렘3:14f)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31:32b)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을 비유하여 결혼한 신부로 비유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하나님께 사랑 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친정집을 잊으라는 당부를 하시면서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신 바 있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 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시45:10~11)

신약성경에서도 그리스도를 교회의 신랑으로 묘사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19:9)

여기서는 또다시 살아 있는 남편과 죽어서 끝나버린 부부 관계를 비유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은 관계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난 관계로 인하여 현실을 망쳐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주고 있다.

사람들이 아무리 과거의 향수에 젖어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가나안을 앞두고 애급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망했고 세상에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거의 죄의 유혹을 추억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영원한 영광의 가나안이라고 하는 새 예루살렘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은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의 영광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지 떠나온 과거의 추한 부끄러운 영광에 연연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죄에 사는 사람은 아직도 죽음의 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요 옛 죄 깨끗케 하심을 망각한 사람이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의 결과로 있게 되는 여러 가지 덕목들을(벧후1:5~7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열거한 후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1:9)고 경계하였다.

우리의 옛 남편인 죄를 죄 되게 하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우리가 새롭게 신랑으로 모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앙적 성결과 충성을 드리는 한 영원한 우리의 보호자요 남편으로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까지 이끌어 가실 분임을 믿고 주님의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 그리스도의 신부로 사는 …



Ⅰ.상대가 죽은 부부의 관계에서 이해되는 자유.(1~3)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사람은 어떤 죄에서든지 죽으면 법적으로 죄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미 6:2~3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죄의 법이 효력을 가지지 못함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한 것처럼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1)고 하여 율법이 살아 있을 동안만 정죄의 도구로 역할 함을 말하고 있다.

사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는 평가는 어느 법이든지 예외가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듯이 역시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2) 이 말씀은 먼저 결혼이라는 제도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육신에 국한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영원을 사모하는 비 신앙의 사람들이 비록 왜곡되게 결혼을 영원과 연결하지만 그러한 혼례는 역시 육신을 위한 것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2) 하였고 좀더 적극적으로 권면하기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

남녀의 문제를 가장 깊이 다루고 있는 고린도 전서 7장은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7:39) 라는 당부를 봐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금 바울은 이 원리를 율법과의 관계에서의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여기 남편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율법을 말하고, 아내는 당연히 이 율법에 매여 사는 모든 사람을 비유하고 이 율법이 그리스도에게서 죽었음을 선언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했는가 하면, 좀더 구체적으로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결국 율법은 장사 지낸 것이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부활의 역사를 밥티스마를 통해서 이루었으므로 또한 각자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이것이 율법의 시대에는 즉, 율법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불가능했었다. 그러나 율법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과의 혼인의 관계는 이미 청산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3)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혼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을 행하는 것이 간음이다.

그럼으로 이 원리는 율법의 시대에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증거 함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귀중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율법은 살아 있었을 것이고 정죄의 법에서 자유 할 수 없었을 것인데, 율법과 함께 죄에서 자유하고 새로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결혼하여 자유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께서 뒤에 가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율법의 정죄에서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게 되었던 과거의 역사를 소개하게 되는데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순종하는 다들에게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는 엄청난 사랑의 역사였었다.



Ⅱ.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4~6)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 부분에서는 육의 사람이 죽었다면 당연히 영의 사람, 생명의 사람으로의 삶이 있을 것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과거의 율법의 저주 아래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죄의 종 노릇하고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그러한 저주에서 벗어나서 영의 새로운 사랑의 법으로 섬김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 사실에 감격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4) 했는데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 하였고 마치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2:19)는 고백과 같이 들린다.

다음 시간에 상고하도록 하겠지만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8~9)

이미 앞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를 권면하여 이르기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고 당부한 바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이르기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6:21)고 경고하였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4b)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혼을 하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전에 죄와 더불어 생활할 때에 “사망”이라는 달갑지 않은 열매를 맺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하고 충실한 남편을 통해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 절에서도 계속 되고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5) 여기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정욕”과 “죄”와 연관된 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과거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어찌 보면 대단히 모순되게 들린다. 어떻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 할 수 있는가? 뒤에서 바울이 고백하듯이 율법은 선한 것이다. 그럼에도 죄가 무엇인가를 율법이 규정하고 나서 이제 그 금지된 것을 더욱 사모하게 되는 우리 지체의 죄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12)

그러나 이 선한 것이 우리의 정욕으로 인하여 더욱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냉장고에 사다 놓은 참외는 할머니 드릴 것이니 먹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는 냉장고에 참외가 있는 것도 몰랐고 훔쳐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 이 말씀은 죄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라는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죄의 옛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과제로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육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일체가 되어 죽고 물에서 일으킴으로 부활에 또한 일체가 되는 과정을 말한 바울은 죄의 사람의 죽었거나, 또는 육의 사람이 주인노릇 하는 삶의 비교를 다음에서 증거 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6f) 죄의 사람은 죽기까지 형벌의 공포에서 자유 할 수 없지만, 죄의 대가인 죽음의 저주를 우리 주님께서 대신 감당하시고 그 죽음에 믿음으로 참여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 하게 되었다는 분명한 약속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 오늘 우리가 중심을 두는 제목이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에서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7:1)

더욱 확실한 증거를 확인하는 내용을 역시 고린도전서에서 증거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그리스도와 혼인한 관계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 즉 정죄에서 자유 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의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와 함께 나를 정죄하던 율법도 죽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과거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던 죄의 관습에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변화된 삶을 위하여 정죄하는 무서운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셨으므로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나 결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육신은 율법의 정죄 받아서 마땅하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어떤 것도 거룩한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다. 여기는 우리의 철저한 순종과 충성만이 비결이다.

새로운 삶에도 주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5:32) 우리 사람들은 거듭 났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는 여전히 허약할 뿐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부어 주신 은혜의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한 대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도록 도우시며(갈5:16)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신령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하지 못할 때에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그리스도인은 [말씀(성령)을 위하여 말씀(성령)에 의한 말씀(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의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요 영원히 자유 하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