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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7:7~13 2007-06-10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바로 앞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는 교훈을 생각했었다. 사실 구약 성경의 율법아래 명령들이나 약속들은 어찌 보면 육신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구약의 대표적 복의 언약인 신명기28장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2~5)

구약성경 속에 영적인 것들은 깊이 감추어져 있고 주로 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누리는 것으로 약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율법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지는 모르지만) 영적인 면 즉 신령한 세계를 위한 약속을 누리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가능케 한다던가 하는 약속들은 볼 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율법의 역할은 육신의 삶을 율법의 명령들에 복종시키는 것을 강조하지만 인간자신의 의지로서는 율법의 요구를 들으면 들을수록 한계를 느끼게 되고 결국은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절망하게 만들고 그러한 죄에 더욱 탄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은 십자가 아래로 데려가는 역할을 한다고 하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분명히 하고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3~25)

바울의 영과 육의 관계 속에서 부조화의 탄식은 다음의 나머지 말씀에서 극에 달하게 되지만 결국 율법으로는 인간을 제어할 수 없다는 한가지만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이 로마서 7장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며 좋은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까지도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다만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빙자하여 사람을 시험하고 노략질 한다. 그래서 주님의 시험 받으실 때처럼 경성할 필요가 있다.(여기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간격을 보게 된다.)

결국 율법이 죄를 짓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율법을 악용하는 악의 세력으로 인하여 바울은 탄식의 손을 들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결국 율법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과 이러한 허약한 사람들을 호시 탐탐 노리는 마귀 사탄이 문제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한 사람도 육신의 허점을 파고드는 어두움의 유혹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 라는 바울의 고백을 함께 들리 수 있는 …



Ⅰ.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7, 12)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12)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바울 사도는 심각한 어조로 묻는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 죄냐?”는 식의 질문을 더러 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서는 이렇게 반문할 수 없다. 우리가 심령이 무디어지면 “하나님 이럴 수 있는 겁니까?” 라는 투정을 하게 되는데 참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나 주시는 것은 모두가 ‘보시기에 좋은 것’ 뿐이요 사람들을 위한 것들만을 주실 뿐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딤전1:8~9) 라고 고백한다.

사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법이 필요 없고 초법의 관계이지만 문제가 생기면 서로 간에 해결이 되지 않아서 최종적으로 법으로 간다. 사실 법은 올바른 관계에서는 필요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법전(法典)이 두꺼워 지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어둡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사실 에덴에서는 법이 한마디 밖에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것마저도 뱀이 하와를 꾀이기 전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법으로 존재 했었다.

그러나 서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에덴의 한마디로 된 법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만든 법이다. 이 한마디가 지켜지는 순간까지 저들은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행복과 희락의 동산에서 모자람이 없었었다.

“…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 이 말씀의 발원지는 다시 에덴으로 봐야 할 것이다.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는 도전을 하기 전까지는 사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별로 관심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시하게 하기 위한 뱀의 술책은 하와를 더 이상 평안한 상태로 버려두지 않았고 금지한 나무의 열매에 더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지난 주간에는 간략한 예로 냉장고의 참외 이야기를 들었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는 말씀은 출애급기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신5:21)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 탐심에 관한 경계는 율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즉 모든 내용을 마무리하는 내용이라는 데도 의미가 있다. 특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12) 라고 할 때 여기 계명은 십계명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바울은 다음 주에 나누게 될 말씀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 라는 고백 속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로 이행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문제인 샘이다.

악에 놀아나는 사악한 사람들에게 금지하고 있는 것들에 더욱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것을 본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사1:4~5)



Ⅱ.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점령하였다.(8, 11)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사실 이 교훈이야 말로 에덴동산의 최초의 범죄의 광경이 가장 적절한 모델이 될 것이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뱀을 통한 사탄의 꾀임은 다른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아담과 하와를 죽지 않게 살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사탄은 교묘하게 들고 나왔다.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었던 하와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6)로 새롭게 보여졌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탄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세가지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6)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사실 처음의 계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오늘 본문의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한 것처럼 하와를 속이고 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는 데 있어서 다른 무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 말씀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이 언제나 변함없는 수법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 했는데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때는 아무래도 아담이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적시 적소의 기회를 찾는다는 이야기이고 그러므로 죄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것을 위해서도 가룟 유다를 통해서 기회를 찾는 것을 본다.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26:16)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4)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아주 특이한 표현을 하는 것을 보는데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11:12)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이미 앞서 4:15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하였던 것처럼 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를 죄로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죄는 분명히 있으되 무덤에 묻혀 있는 것처럼 세력을 뻗칠 수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 9절에도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라는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고,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이는” 일은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위험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과 살고,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는 범죄의 가능성을 가졌을 때처럼 동일한 경계로 들어야 할 것이지만 가인보다 확실히 쉽고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인 치심으로 와 계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적극적으로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는 당부를 듣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거룩한 새 언약의 법과 계명인 말씀 조차도 무기로 삼고 범죄 할 기회를 찾아 오늘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죄의 세력에서 승리하는 …



Ⅲ.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9~10, 13)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우리의 말씀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7f) 했고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12)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다루게 되는 이 말씀들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율법 자체가 죄가 아니며 더욱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라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9~10) 라는 탄식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율법에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은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8:5) 하심으로 하나님의 법은 지키고 행하면 사는 것이었지만 죄를 가진 인간은 도저히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야고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동일한 경계를 바울 사도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지키지 못할 그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함께 지시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살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저주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인류를 그 저주에서 풀어 해방하시려고 애급에 종으로 잡혀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자유케 해 주시려고 애급의 왕에서부터 백성들과 구별하시려고 유월절 양으로 피를 흘리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유월절 양이 되셔서 죄와 절망의 저주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선한 것, 의로운 것, 거룩한 것이 저주의 도구가 될 수는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절대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마지막 말씀이 결론이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13)

이런 이유에서 율법을 지키려다가 실패한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갈 수 밖에 없고 사실 율법은 이를 위해서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우리는 이러한 바울 사도의 논지를 같은 갈라디아서에서 증거 하는 말씀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1~24)

하나님의 주신(부터 온) 모든 것은 그것이 율법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죄인하여 선한 것이 마귀에게 이용되고 기회를 타서 우리를 죽이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모든 구약적인 율법과 계명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과 교훈들도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와야 한다는 한가지 방향표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아래 왔을 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b~17)는 귀중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