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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도 우리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씀과 함께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율법의 역할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도 율법의 논의를 계속한다. 결론부터 논한다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선을 행하고 싶다는 선한 욕망이 있다고 할지라도 죄 아래 팔린 육신은 오히려 진노의 대상인 죄를 더 잘 택하고 행한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선한 노력은 결국 한계가 있고 이렇게 의를 행하고 싶어 탄식하는 인간이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각오나 결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의 온 갓 수행과 종교는 허약한 한계를 들어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정진해 봐도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나는 죄의 욕망을 잠재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인간의 욕구를 잠재우려는 것 보다는 올바른 쪽으로 이끌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수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가장 허약한 욕구의 하나인 성(性)에 관해서도 바울 자신은 독신 생활을 하지만 “2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억제하는 것보다 효과적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탄식하는 인간이 비로소 완전히 의의 자리를 회복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결단과 노력보다도 하나님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바울 사도 뿐만 아니라 모든 영적으로 고민하는 인생들임을 알게 되고 그런 유약한 이간들이기 때문에 죄의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마련하신 하나님 아버지게 감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은 이러한 은혜의 역사를 맛볼 수 조차 없으므로 믿음의 중요성은 더욱 분명히 들어 나게 되는 것이다.
Ⅰ.거룩한 율법과 죄 아래 팔린 사람.(14~20)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고 죄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시지만, 마귀-사탄은 언제나 육신의 소욕을 힘입어서 우리 영혼까지도 죄 아래로 끌어 오고자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이것은 늘 세상의 사람들에게 상당히 성공적인 것을 보게 된다. 이만큼 육신이 죄의 소욕에 약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삶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이것을 초월해 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코 육신을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는 인생은 없다. 육신을 벗는 순간 그것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1.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가는 자신을 본다.(15, 18~19)
(15)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자연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렇게 많은 도덕과 윤리 교육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언제나 범죄로 달려가고 마는 것을 보면 바울을 통한 이러한 고백은 지실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요즘 청소년들의 범죄의 급증을 보면서 세상이 한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죄를 짓고도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그렇게 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는 점점 죄에 대한 자책도 무뎌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자신이기 대문에 우리는 자신을 의뢰하다가 늘 속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 아래 난 우리 자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9)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2.결국 이렇게 된 것은 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기 때문이다.(17, 20)
(17)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두절 속에 공통적인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다. 여기서 죄가 인격 즉, 의인화 되어 있다. 죄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큰소리치며 참소하고 멸망으로 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 대문에 바울은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제어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죄를 친히 감당해 주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3.비록 인생이 죄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하다고 할지라도 율법의 선한 것은 더욱 들어 난다.(14, 16)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6)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우리가 선하게 살 수 없다는 것과 죄의 수렁에서 절망을 경험할수록 하나님의 요구인 율법은 선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뿐만 아니라 12절에서도 이미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면 인생에게 남는 것은 절망과 저주 뿐이란 말인가! 그래서 이 갈등 중에서도 확신하는 마지막 부분과 육과 영의 삶의 분명한 차이를 다음 8장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Ⅱ.이 사망의 몸에서 도망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21~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 속에 율법 즉,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법 아래로 끌려가는 인간의 유약성을 탄식하고 있는 것을 듣는데, 적어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목숨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하려는 바울 자신의 안타까움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일반적인 모든 사람 즉, 인류를 대표한 하소연 이라고 이해된다.
결코 죄와 율법 사이에서 갈등 하거나 방황하는 모습을 이 본문 외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죄에 연약한 인간성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절제력과 영적인 것에 대한 헌신은 대단히 단호함을 보게 된다. 자신의 독신을 이야기 하면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7:7)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1.육체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는 죄 아래 인생의 허약함을 고백 한다.(21, 23, 25b)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5b)…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믿음의 사람들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강자, 무적의 강자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그치면 안 된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선을 행하려고 발버둥쳐도 계속 알아지는 것은 악의 힘이 강하다는 것 뿐이다. 번번히 시작을 용감하게 해 보지만 결론에 가서는 또 다시 만신창이가 되어 죄의 시궁창에 쳐 박혀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결론을 얻을 뿐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
마치 세찬 방죽의 물결 사이로 상류로 올라 보려는 참게와 같이 시도하고 또 도전해보지만 나중에는 마침에 발가락은 다 힘이 빠져버리고 그 방죽의 물결에 더 세차게 떠밀려나 버리는 참게의 신세와 같은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바울은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6:19)는 당부를 한 바 있다. 여기에도 비결이 있는데 그것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더 강한 자에게 드려서 해결하는 방법이다.
결국 인간의 노력으로 해볼 수 있는 종교 행위가 바울이 지적하는 결론이다.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b)
2.그러나 율법에 대한 공경심이 전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22, 24)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속 사람이란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하고 모든 인류가 타락하기는 했어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일부분이나마 남아 있고 그런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양심이라든가 윤리나 도덕 같은 부분에서 나타나고 그런 쪽에 민감할수록 죄에 대한 수치심은 더 많을 수 있다. 또 이러한 내적인 부분이 잘못 표현되기는 하지만 세상의 다른 종교를 갖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진리를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적인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되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라는 바울의 고백에서도 들을 수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 24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사람이 하고 싶은 부분이 안되고 하기 싫은 쪽이 점점 이루어져 간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특히 그것이 영적이고 내면적인 쪽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것이야 말로 ‘나’는 있으되 ‘나 자신’은 없는 비참한 것이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고 하는 ‘만족’은 그 ‘성취’에 관계없이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함을 경험하고 육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조차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면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것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비참한 것이다.
스스로 “나는 과연 비참한 인생이다!” 라는 탄식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죄 아래 사는 인생의 아픔이며 처절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탄식과 절망을 해결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야 말로 은혜중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속 사람, 즉, 내면의 성취에 만족하면 외부적인 환경은 충분히 극복하고 남을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는 그 많은 율법적인 지식과 세상적 학식에도 불구하고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가 외 이 따위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탄식이 없었다.] 불만이 없었고 만족할 수 있었다.
3.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25f)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2, 24)는 탄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는 고백과 함께 기쁨의 고백을 드리게 된다.
이 로마서 7장 전체가 “나” 또는 “내가”가 주체가 되면서 절망하는 결론으로 가고 있는데 반하여, 유일하게 이 25f 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 되어지고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는 감사의 찬양이 드려지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부활의 논증 말미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라는 고백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노력이 바닥 나 버린 웃음과 희락이 바닥나 버린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져야만 회복이 가능하다.
우리는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기쁨과 흥을 잃어버린 가나의 한 가정의 이야기를 요한복음 2장을 통해서 읽게 된다.
기쁨과 웃음으로 시끄러워야 할 혼인 잔칫집에 흥을 돋우는 도구인 포도주가 바닥 났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흥을 찾을 방법이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 졌을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맹목적이리 만큼 순종하는 하인들의 충성은 주님께서 물로 만드신 포도주이지만 정상적으로 포도를 따서 만든 포도주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이 많다.
모든 불가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서 풀리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서 요구되는 첫번째의 문제가 죄의 해결 즉, 사죄의 문제이고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주님만 가지고 계신 것이다.
죄의 고민으로 괴로워 하며, 인생의 힘겨운 숙제를 붙들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은 다른 데는 없다. 무조건 모든 문제를 싸 들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맡길 때 인간 자신의 노력과 투쟁으로 불가능 했던 일들이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의뢰하거나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자기 부인의 사람이다. 죄의 자신이 죽을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차지하는 범위가 커지고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더욱 자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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