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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8:1~8 2007-06-24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는 바로 앞 7장에서 선한 율법조차도 죄로 인하여 무력하게 만드는 죄의 무서운 지배 앞에 점점 탄식하고 절망하는 인생을 봤다. 사실 그러한 절망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그래서 비록 죄의 결과로 사람에게 나타난 비극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좌절과 절망을 인생에게 맛보게 하심으로 생명과 빛을 사모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철저하게 절망하는 인간일수록 고개를 들어 하나님과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향해 눈을 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8장에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탄성의 고백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으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은 어리석고 불쌍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비극과 고통은 저주일 뿐 아무 가치가 없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과 절망을 인하여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게 될 때 비로소 저주의 고통이 밑거름이 되어 생명을 움 틔우게 되는 까닭에 과거의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절망하던 것조차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라거나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라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결심과 각오는 죄로 인해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인간적인 방법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방법이 아닌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마련하신 전혀 새로운 방법이요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8장에서는 인간의 비극이 종지부를 찍고 소망의 빛이 정오처럼 빛나게 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으로 성령의 법이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0)

사실 17절까지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요 인간 측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라는 데서 지금까지의 절망(絶望)의 반전(反轉)이고 영적인 로또와 같은 횡재이다.

하는 짓마다 하나님을 진노케 했던 행위는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 아닌 성령에 의해서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화해와 교제의 장이 마련되고, 이것이야 말로 죄인들에게 있어 마지막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거절해 버리면 더 이상의 길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육신의 방법을 신뢰한다면 영적인 생명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할 뿐이라고 경계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맛보고서도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더러 보는데 바울은 여기에 대해 한탄하기를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사실 이 같은 큰 은혜를 저버린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2:3) 라는 두려운 경고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복음을 거부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이유는 이것이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방법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외면한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1) 라는 심판이 기다릴 뿐이라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 1~17절까지의 말씀을 절반으로 나눠서 전혀 새롭게 열린 죄에서 자유케 되는 은혜의 역사를 생각하고 뒷부분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논리에서 그치지 않고 신제적인 각자의 체험과 감격으로 확인될 수 있기를 …



Ⅰ.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앞의7:25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감격했던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들의 피난처임을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 이 8장의 시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 앞의 두 절은 반복해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란 감격의 외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제”가 역시 중요한 이유는 더 이상 인간을 절망 시키는 저주의 법이 아니라 주님께서 대신절망의 죽음을 정복하신 희생으로 자유를 찾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사실 바울 사도의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로마의 감옥 속에서 쓴 서신들(엡, 빌, 골) 속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들이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불편한 상황을 오히려 생명의 보호 처인 ‘그리스도 예수 안’을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육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 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호 받는다는 감격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죄의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에서 장사 지내고 일으킴을 받은 세례를 거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성령께서 선물로 주어져서 함께 거하시는 영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고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들을 정죄할 어떤 대상도 없다는 말씀이다. 나중에 이 8장을 마무리 하면서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3~35)고 확인하고 있다.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회복하기 위하여 주신 율법은 성령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기 때문에 죄의 사람이 온전해 질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은 인간의 노력보다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법이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감격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애급에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하신 것처럼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빠져 나올 수 없었던 비극적인 상태에서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有一無二한 법이다. 이 법안에 보호 받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절대로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Ⅱ.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역시 인간의 절망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망이 교차되고 있다. 앞에서 살핀 대로 율법은 선하고 신령한 것이었지만 연약한 인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을 보았듯이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한, 죄의 도구인 육신은 어떤 것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인류를 그냥 썩썩 털어서 “이제 됐다”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성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모든 인류의 죄를 친히 감당하셨다.

“…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는데 사도행전 20:28b 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어떤 이유에서도 결코 약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사도행전13장에 바울이 비시다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면서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9)고 같은 증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인간적인 단서가 있는데 그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의 법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만이라는 조건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좀더 구체적인 방법을 바울 사도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하였고, 다시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라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시도하던 모든 영적인 일에도 실패를 경험했다면, 그것은 우리 육신의 노력이었을 뿐이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약속은 주님 오실 때까지 유효한 약속이다. 이 말씀을 좀더 확대하면 율법 속에서 요구하는 ‘의로움’이 거듭나서 성령의 법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진다는 약속이다. 율법은 인간의 약점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피로 세운 새 언약은 하나님의 강함 때문에 실패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는 모두로 사시기를 …



Ⅲ.육신과 영을 좇아 사는 결과.(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제 이 뒷부분의 마지막 네 절의 말씀이 다시 육신의 한계를 또 다시 한정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힘을 빌어 사느냐? 어떤 능력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을 확인하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사람이 추구하는 바를 보면 그 사람이 육신적인 사람인지 영적인 사람인지 판가름 난다. 여기 [좇는, katav, ]이라는 말이 좀더 쉽게 옮기면 [따라] 라는 말이다. 개역개정만 봐도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하는가가 그대로 나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이다. 예배의 오래된 찬양은 별로 감동이 되지 않으면서 7~80년도의 노래가 나오면 추억에 감격하는 모습은 분명히 육신을 좇는 사람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섬기고 주님의 진리와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영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무엇을 따라 살든지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결과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본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결과를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이 결과는 먼저 선언 된 바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7:5)

아무리 거룩한 척 해도 육신을 따르는 자는 사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결정된 운면이라면, 내 사리에 맞지 않고 이성과 감정에 어울리지 않을지라도 진리의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그 힘겨운 길이 마지막에는 생명과 평안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고 확인한다.

약속대로 육신을 따라 사는 것보다 진리의 성령을 따라 날마다 생명과 평안이 충만 하시기를 …



Ⅳ.육신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생명의 빛이 비침에도 한 구석에 어두움은 웅크리고 있음을 본다. 영적인 새 언약은 선언되었지만 그 신령한 법에 오로지 육신으로 맛서는 안타까움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육신의 생각은 소극적으로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비극적인 판결을 다시 듣는다.

구원의 진리는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감성적으로 몰입 되지 않아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되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수용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런 면이 많다. 합리적이지 못할지라도 말씀이 명령하면 행하고 납득이 안되도 말씀이 잠잠 하는 것에는 침묵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실 육신으로 이해되는 것만 수용한다면 벌써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불과하다.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정 받은 것은 하나 같이 이성적으로는 육신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 뿐이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과연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됐을까? ‘동물제사만을 원하셨던 하나님이 인육 제사를 명령하시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지체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일 수 있는 것이다.

애굽을 나올 때 집집마다 장자의 죽음으로 호곡하는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 하라고 하는 것도 인간적으로는 너무 잔인하게 생각되었고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이스라엘은 그대로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5~36, 3:22, 11:2)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세상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육신이 주도하는 종교생활을 야고보는 경계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보이는 세계를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세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영적인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못하고 주님의 뜻에 대치하는 원수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즉,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거듭 났다고 큰 소리쳐도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진리이다. 죄 투성이인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령과 교통이 불가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바울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하였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성령의 생각이 아니면 절대로 하나님의 영과 통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육신이 나서서는 안된다. 어떤 집에 주인을 만나러 가면 주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강아지가 짖어대면서 손님을 맞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만나시기를 원하는데 마치 범죄 하여 육신의 사람이 된 에덴의 나무수풀 속에 숨어 있던 아담처럼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는 것은 우리의 죄를 주님께서 대신 감당 하심으로 처리 하셨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처절하게 싸우며 지켜보려다가 절망만 경험하게 되었던 율법의 요구는 죄 씻음을 받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그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사망이 충만하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넘치는 삶이 될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성령의 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길은 분명하고 결과도 너무나 분명하다. 선택은 각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찾아주신 새로운 성령의 법과 과거의 죄의 습성에서 여전히 종 노릇 하는 육신의 삶은 더 이상 우리 각자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보다 선택과 순종을 요구한다.

분명히 쉬운 성령의 법보다 어렵고 힘겨운 당연히 죽을 육신의 법을 따른다면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법은 효력을 나타낼 수 없다.

모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약속을 풍성히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