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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들이란 성령이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나누면서 최종적인 점검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b) 검증을 말씀 드린바 있다.
종은 주인의 당하는 고통에 딴 생각을 하지만, 아들은 다르다. 왜냐하면 그 기업은 바로 자신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녀는 절대로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며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는다.
아들만이 가문의 영광을 위한 고통을 감수한다.(예수께서 모범)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능하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여기에서부터는 아직도 죄의 속성을 가진 제한된 육신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기대하는 소망을 고백하고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는 구속의 은혜를 입은 피조물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성령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본다.
비록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어쩔 수 없이 섞어지는 것들에 종 노릇 하는 자연의 신음 소리와, 비록 영혼은 주님의 구속으로 완전한 구원을 확보했지만 육신을 이끌고 살면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에 노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의 안타까운 탄식과 함께, 주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싸움을 보면서 제한된 이 세상 속에서의 안타까움을 더불어 탄식하는 성령의 기도가 있다.(다음시간)
그럼에도 죄로 인한 탄식은 절망이지만, 비록 현실 속에서 제한된 구원을 누리긴 하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육신의 구원까지도 완전히 성취될 미래를 기대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죄와 싸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의 싸움의 고통을 격려하시는 성령의 안타까움이 다음 시간에 계속 나누게 될 것이다.
Ⅰ.영광이 약속되고 있는 현재의 고난.(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바로 앞 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는 약속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저주를 받으심으로 회복될 영광은 아직도 미래적이다. 미래의 약속이 분명한 이상 현재는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 미래가 없다면 아무리 현실이 안락해도 두려움과 절망 뿐이다. 그럼에도 불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적이다.
일세기 때에 계속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부활의 영화로운 아침, 그리스도의 샛별이 밝아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기꺼이 고초와 죽음을 받아드렸고 오히려 구차히 죽음을 면하려 하지 않았었다.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을 보면 믿음의 장인 11장 말미에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5b~38)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장래에 대한 소망과 약속이 없었다면 이들은 이렇게 담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영광은 반비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겪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는 말이 현재의 고난 – 장래의 영광과 대칭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건데’[헬, 로기조마이(logizomai)]가 ‘계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타산적으로 따져봐도 절대로 손해날 것이 없다는 실리성을 의미한다. 성경에 많은 곳에서 “유익이 없느니라”는 표현을 보는데 낱말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고 우리의 목표가 현실에 안주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그 기대하는 바가 지극히 클 뿐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현세상 만큼이나 편리하고 살기 좋은 시대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으로 애착을 둘 수 없는 것이 하늘 백성들의 나그네 기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들어야만 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너무나 다르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쩌면 주님께서 오시지 않기를 더 바라는 야릇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에 상급을 쌓는 사람들에게는 변함없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큰 소망이요 위로일 수 밖에 없다.
Ⅱ.피조물들의 탄식과 고통.(19~2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시상(詩想)을 가진 작가들은 자연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 후의 피조 세계는 사실 탄식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성경의 음성을 더러 듣게 된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렘12:4) “그들이 이를 황무케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무함은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렘12:11)또 여기 만큼이나 자연의 심상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곳도 드물다.
하나님의 창조시에 자연은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 그러나 연이은 인간의 타락은 이 보시기에 좋았던 땅에 비극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3:17~18)
그런가 하면 베드로 사도도 공교롭게 이런 선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21) 즉,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라는 것으로 봐서 사실적으로 만물이 부조화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피조 세계의 상태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에 의해서 순순히 사용되고 파괴되는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고대하고 있고, 바울 사도는 이 ①피조물들의 절규와 ②피조물들의 소망을 들었다.
1.피조물들의 절규 즉, 탄식의 소리는 20, 22절이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자연은 지금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파헤쳐지고 난도질을 당하면서도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의 사람들의 자연 파괴에도 잠잠히 말이 없이 당함을 본다.
이것을 가리켜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굴복은 사실에 있어서 자신들의 힘이 약해서 라기보다는 자신을 지배하는 왕의 명령에 의해서 임을 전쟁이나 정복의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데, 이런 창조주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위임 때문임을 본다.
그런 이유 때문에 ‘순종’이 아니라 ‘굴복’하게 되는 것이고 사실 자연은 창조주께는 가장 완벽하게 순종하는 모범을 본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러면서도 자연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 없는 탄식을 하면서 고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멸망 당할 존재들에게 먹혀도, 이용당해도 억울하기 때문에 마치 옛날 부모들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여 눈물로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신부와 같은 슬픔을 피조 세계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원치 않는 대상에게 정복 당하는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이다.
이러면서도 피조세계는 탄식하면서 하나의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19, 21절이다.
2.피조물들의 소망 즉 기대하는 바를 19, 21절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비록 지금까지도 그리고 언제까지일지 모르게 허무한 대상에게 굴복을 당하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의 십자가로 인한 허무한 인간들의 회복의 길이 트였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도 복종하고 있는 자신들이 본래의 위치를 회복할 때를 기다리는데 그 때가 바로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회복될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鶴首苦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대하는, 헬, 아포카라도키아(apokaradokia) – 머리를 앞으로 빼고 보려고 하는] 그 때가 비로소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영광을 논증하던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2~24)는 말씀을 적고 있다.
모든 피조세계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창조주를 거역했던 일단의 천사들의 타락으로 인한 반란이 제압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의로우신 통치가 실현될 때를 우리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가 고대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쩌면 반드시 이루어질 인류의 운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우리는 더욱 그 약속을 사모하고 소망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Ⅲ.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①탄식하며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고, ②보이는 세계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더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1.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탄식한다.(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바울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고 죄의 도구로 전락하려는 육신의 연약함을 탄식했었다.
주님의 백성들의 영혼은 온전히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성령과 더불어 구원을 누리고 있지만 육신은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갈등하고 탄식하며 죽을 이 몸 때문에 영혼 조차도 때로 근심하며 한탄한다. 그러나 이미바울은 앞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6) 라는 자긍심을 증거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예수께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오실 때 변화된 육체를 입게 되어 죄에 대한 욕망을 정복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다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6~18)는 긴장으로 영으로 육신을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2.더 좋은 소망을 가졌다면 인내로 기다린다.(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바울 사도는 같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소망을 가질 것은 주문하고 격려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분명히 한계가 있고 결과에 가서도 소망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시간이 되면 성취되고 소멸되는 소망은 엄밀하게 말하면 죽은 소망 땅의 소망이다.
소망이 확고해야 우리의 현실의 삶도 흔들리지 않을 것인데 그래서 보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약속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아프면 약해지는 연약한 몸 덩어리, 이것에 소망은 애당초 기대치 말아야 한다.
그 육신의 건강을 과신하다가 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젊음을 자랑하고 그 젊음에 기대를 거는 것도 소망일 수 없는 것은 육신은 낡아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 했는데 이미 앞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8) 라는 확신의 기대를 가진 우리는 인내를 경주해야만 한다.
특히 여기서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격려하는 소망은 더 애절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환란과 고통과 핍박으로 인하여 힘겨운 상황 속에서 주고있는 격려이다. 이들에게 남은 기대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이 유일한 기대임에도 여전히 재림의 기대는 보이지 않고 핍박의 고통만이 계속 옥죄어오는 가운데 위로가 필요했고,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세상의 어떤 기대도 진정한 소망이 되지 못함을 일깨우면서 죄의 유혹으로 인한 우리의 육신의 한계와 유혹에 직면하게 되면서, 이 세상과 전혀 반대의 원리로 ‘세상을 거스르면서 사는 대가가 과연 있는가?’ 라는 회의 감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는 현실 속에서의 믿음으로 오는 고통과 그럼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세상의 주는 소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신 시켜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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