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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8장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하나님의 마련하신 복음의 위대성을 증거하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라거나 그 복음을 순종하는 대상을 향해서도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2:10)는 복음으로 구원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한바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논리를 인류를 향해 선포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의 예정에 관한 계획과 수행을 본래 율법을 받았던 자기 민족 속에서 확인하면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계획에 의해서 임을 이 9장에서 논하고 그 거부의 내용을 다음 10장에서 밝히고 다시 11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복음 거부로 이방인 구원을 받고 다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은헤의 약속에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 받게 되는 하나님의 예정과 신비를 증거 한다.
그러므로 이 9~11장의 이론은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자기 민족에 관한 허와 실을 증거하면서 시작에서는 자신의 민족의 불신에 대한 침통한 심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11장 말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구원의 역사에 찬양을 돌린다.
모든 성경이 그렇겠지만 사실 이 부분이 로마서 중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바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이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민족적 불신앙을 보면서 탄식하는 바울의 심장이 되시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바울과 같은 온전한 감사와 감동을 누리는…
Ⅰ.자신의 민족을 향한 안타까움.(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 사도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는 탄복하고 감격하는 모습이었다면 자신의 주위의 불신을 보면서는 탄식하고 안타까워 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유익보다는 언제나 하나님께 유익이 되기를 바랐고 교회의 융성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감수하겠다는 자세가 그의 육신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
1.바울의 마음의 큰 근심과 고통은 오로지 자기 민족 구원에 대한 것이었다.(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바울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고 처신했기 때문에 진실할 수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 즉, 진리 안에 거할 때 사람은 가장 진실 될 수 있다.
주님이나 바울은 결코 근심을 장려한 적이 없다. 자주 하는 말씀이 “근심하지 말라!”였다. 그러나 한가지 허용된 근심과 걱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즉, 구원을 위한 탄식이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경계를 주었다. 오늘 나는 주로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고통 하는가!
2.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은 자기 민족 구원이었다. “나의 형제 곧 골 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
사실 이것은 바른 신앙의 사람이라면 율법시대에서부터 그랬다. 모세는 40 주야를 금식하고 십계명을 받아 내려오다가 타락한 자신의 민족을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을 위해 하나님께 하소연을 드렸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어찌 되든 나는 살아야 겠다는 식인데 이런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헌신을 하겠다는 모습은 귀하고 또 하나님의 약속에 견고한 믿음의 소유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적 자세이다. 주님께서 그러셨고 바울이 그랬으며 하나님은 오늘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이 그러기를 기대하신다.
3.영적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인데도 복음에서 떠나 있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4~5)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보이는 모습 속에서는 분명이 저들에게는 하나님을 가까이 섬길 조건들을 충분이 가진 종교적인사람들이었고 더 많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경험들을 조상들로부터 수없이 전해 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치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4-표준새)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바로 저들의 계보에서 나셨는데 같은 종파임에도 너무나 다른 그들의 불신이 바울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존귀하신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신데 찬양하고 기뻐함으로 받지 못함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탄식하는 이유였다.
우리모두는 또 저들보다 더욱 유리한 입장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더 큰 의미와 책임이 있다.
Ⅱ.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6~8)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계셨음에도 결국 바울이 불신의 자기 민족을 보면서 탄식하면서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헛것이 되었는가? 라는 불신의 반론이 아니냐는 의심을 거절하기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라는 확인과 함께 이렇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바꾸시거나 취소하신 것이 아니라 더 심오한 계획의 실현임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실 이스라엘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향하여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결국 너희들이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비의 행사를 행하려 한다(44)고 책망을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들이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하시는데 자녀이면 반드시 자신의 아비의 행동을 본 받을 것이라는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는 두려운 책망과 함께 주님의 말씀이 저들 속에 거할 곳이 없다는 탄식을 하셨다.(37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이러한 사실들과 함께 오늘 본문의 내용은 중요한 신앙적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믿음의 계보는 육신의 계보가 아니다.(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겨루어 얻어낸 이름이 이스라엘이지만 그의 후손 모두가 하나님의 복 주심을 야곱처럼 사모하지 않았다. 물론 다음에서 더 구체적인 사실을 들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믿음의 가정에 났다고 부모들의 신실함을 그대로 가지고 나거나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실 이래서 믿음은 각자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믿음을 계승하려는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수 천대에 이르게 할 비결이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말씀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 6~7)는 어쩌면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지극히 당연한 말씀 속에 신앙적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육신은 육신을 낳는 것이기 때문에 영으로 나는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을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라는 교훈을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에 두고 자녀들이 영적으로도 이스라엘로 즉, 영적으로 나는 것 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현 세상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들이 매몰차지 못하면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녀들의 믿음으로 남도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영적으로 거듭남도 육신적으로 확연히 판단이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하셨는데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열매로 판단이 될 것이다.
2.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7~8)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씨는 먼저 난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어찌보면 아브라함이 원해서가 아닌 사라의 작품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묵묵히 기다렸지만 사라의 부추김으로 하갈을 취하고 그 결과로 얻어진 자식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영적인 것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일어나는 인간적인 일들이 너무나 우리의 신앙 속에 많다. 지극히 영적이어야 할 삶이 지극히 육신적인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불신의 자기 동족을 보면서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는 바울의 안타까움은 참으로 보이지 않게는 눈물을 삼키며 한 말일 것이다. 믿음의 가정에 같은 믿음으로 살려는 자식들이 난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는 것은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각자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시 낳는 산고의 고통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Ⅲ.미리 아신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9~13)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제 오늘 상고하는 이 마지막 말씀에서 실제적으로 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론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함께 경고하러 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창18:10) 왜 이 구절 뒷부분에다가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는 내용을 붙였을까?
연이어 아들을 낳을 당사자인 사라의 모습을 적는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3) 물론 이 일로 귀한 믿음의 자식이 [웃었다]는 이름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의 귀한 약속을 비웃는 사라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이름을 믿음의 조상들의 계보 속에 남기신 것 같다.
1.하나님과 더불어 약속 된 것만 효력이 있다.(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언약하지 않으신다. 이미 그 사람의 됨됨이를 미리 아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성향을 따라서 복 주시고 징벌하시는데 어떤 그럴싸한 조건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성취하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것은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 또 어떤 부류는 이 말씀을 같이 적용하면서도 ‘나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이 말씀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굳게 설 것임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다리는 자세가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필요하다.
오늘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누구든지” 순종자가 약속에 포함된 사람임을 변명할 수 없다.
2.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되어진다.(10~13)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는 다시 아브라함의 다음 대인 이삭과 리브가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보다도 사명의 문제 속에서 더욱 심중히 이해해야 될 일이지만 이삭 한 사람에게서 난 두 아들의 문제를 들면서 ‘그 자식들이 ①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②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③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④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⑤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라는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앞의 8장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는 부분을 나눈 바 있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성격이나 모든 성격 조차도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결국 불신의 조성자가 된다는 이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태를 이미 그가 생기기 전부터 현제로 보시고 거기에 합당한 그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이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했는데 인용된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하였고 두 사람의 성향 때문에 역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1:2b~3)고 말씀하는데 이 본문도 오늘 우리의 과제와 더불어 생각해 보면 결국 육신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을 예언하시고 그로 통해서 차자인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정하시고 시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나 욕심에 의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보장이다.
바울의 자신의 민족의 불신을 탄식하는 눈물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의 근심과 고통은 그것이 비록 동족이긴 하지만 자신의 구원이나 일이 아니라 타인들을 향한 것이었다는 데서 위대함을 본다. 비록 자신이 그 귀한 구원에서 떨어지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눈물로 호소하는 진정한 사랑을 본다.
영적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임에도 그들이 진리에 서지 못함을 보면서 자신의 겸손을 채찍질 하는 것을 본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굳게 설 것이다. 인간의 계획이나 감정, 노력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역사의 진행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역사에 기꺼이 자신을 맡겨야 한다. 육신의 계보가 믿음의 계보가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삶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조상들처럼 누리는 귀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역사에 이루어 지는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일들만이 성취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버려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인 구원의 복음에 순종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요, 택함을 받은 자들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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