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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께서는 지난 시간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11f)…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3) 라는 말씀들이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대단히 편협적이고 강제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론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다음의 논리를 진행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전체적인 말씀의 줄거리들도 인간의 자세나 형편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대단히 독단적으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이끄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이럴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운행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공의나 사랑에 대한 오해는 풀어가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조심스럽게 전제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8:29) 라는 앞 장에서의 가르침을 머리에 두고 이해한다면 결코 무조건적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선택하고 저주 받도록 형벌하시는 주님이 아니심을 확신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인물들은 모두 구원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선택된 귀중한 인물들이고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자세나 인간 됨됨이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오늘 이방의 왕인 [바로] 라고 하는 인물의 완악함이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다는 단편적인 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의 운명이나 인생은 안중에도 없는 분처럼 독선적으로 오해 되지만 역시 이 부분에서도 이미 바로는 완악한 군주였었고 그러한 성향의 사람을 그 성격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한 도구로 쓰셨음을 지혜의 사람 솔로몬도 알고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고 선포한다.
결국 가룟 유다도 하나님께서 나기 전부터 예수 팔고 저주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요한이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는 악한 성향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성향을 미리 아시고 사용하신 것이다.
특히 이 구원의 역사 속에 쓰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나 생각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과 긍휼의 은혜를 인하여 라는 바울의 인생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사울이 바울 되는 역사는 그 사울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를 없애보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계산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였었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사울의 동역자들 내지는 추종자들 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원함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임을 믿고 감사 드려야 한다. 바로 이 시작의 분에서부터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Ⅰ.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이루어가는 구원.(14~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그렇다고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불의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이미 3:4~6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다. 요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은 가릴 것이나 수치스러운 것이 있으실 수 없다는 표현이다.
사실 불의하신 하나님 이시라면 그분은 죄를 심판하실 수 없고 죄에 대해 간섭하실 수도 없으실 것이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조장하시거나 한 사람이라도 사탄의 수하에서 멸망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거나 “…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b)는 말씀들은 입에 발린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씀들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 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2.인간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되어 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16f)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여기에 인간의 의지나 능력은 완전히 제외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표준새] 인간이 아무리 좋은 목표와 그럴싸한 방법으로 접근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제외된 인간 노력은 영적인 부문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물론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인간이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일이나 은혜에 있어서 인간의 자의적인 노력은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3.결국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과 원 하심의 성취이다.(15~16b, 18)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여기에 계속 강조되고 있는 한마디는 “긍휼, 긍휼, 긍휼, 긍휼”이다. 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만이 우리의 구원에 가치가 있고, 생명이 있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순종이 있고, 영광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원함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음을 감사해야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긍휼을, 불쌍히 여기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감사하자! 여러분 모두가 바로처럼 강퍅케 하심을 입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영광 돌리기를 …
Ⅱ.비난 받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19~23)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은 더욱 깊이 다가간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몇 가지의 항목들 중에 여기에 한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느냐-공동;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표준새)” 욥은 고난 중에서도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9:32) 라고 인간 됨을 하소연 한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는 우리의 어떤 조건 속에서도 창조주를 원망할 수 없다. 또 원망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 하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이제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그릇을 만드는 것에 창조주를 비유한다. 사실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는 부분은 성경에 상당히 자주 나타나는 비유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을 만드셨으므로 토기장이의 비유는 가장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지천에 널려 있는 한 줌의 흙이 토기장이에게 선택을 받아 쓸만한 그릇으로 태어나는 것은 흙에 대하여 대단한 영광이 될 것이다.[한 줌의 흙]
그러나 이 그릇을 만듦에도 그릇의 용도는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18:3~4) 지음 받은 그릇은 감히 자신을 만든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가를 항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에 있어 일/군으로서의 그릇을 비유하면서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고 궈면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릇의 재료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22~23)
이미 모든 인류는 깨어져 진노를 받아 멸할 수 밖에 없는 저주의 그릇이었음에도 오래 참아 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광을 받을 거룩한 약속으로 이끄심에 얼마나 더 감사해야 할 것인가를 헤아려 감사해야 하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하고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단한 도전이 될 뿐만 아니라 길이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배은망덕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긍휼을 입음에 대한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 저주 받아 영원히 형벌 받을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복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대신 형벌 받게 하심으로 그 은혜에 의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입히신 하나님은 어떤 이유에서도 비난 받을 이유가 없으며 오직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존재이시다. 할렐루야!
Ⅲ.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24~26)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이제 사람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결코 구원을 누릴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주도되는 구원을 이야기 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주적인 주권은 절대로 비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한 후에 그럼에도 이스라엘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다는 감격을 호세아서를 인용하면서 증거하고 있다.
호세아서를 보면 선택되었다고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1:9)고 하여 주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불충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하심에 대해 증거 하신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2:23)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밖의 짐승처럼 취급 받던 우리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구원에 부르심을 선언하고 계신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오늘 우리가 긍휼히 여기심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자격이 없는 자들을 부르심에 대한 감격이 여기에 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이 전혀 우리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해서 임을 생각할 때 그져 부르신 은혜에 감격할 수 밖에 없고 일생을 그 은혜주심의 대가에 합당하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자세이다.
오늘 우리가 구원 받은 사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예배의 처소를 받은 것도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은혜 받은 자에 합당한 삶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하여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1:11~12)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고 불평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각 사람의 성품과 삶을 미리 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순종과 불순종도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깨끗케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으로서 비난 받지 않으시고 무엇보다도 오늘 나로 하여금 사랑을 입게 하시고 복음에 부르시고 의로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씻기셔서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자리에 앉게 하신 사실이다.
이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 날마다 순종과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늘의 신령한 기업의 상속과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을 잃지 않는 지속적으로 사랑 입은 자녀들로 살 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사는 이 말씀을 드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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