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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9:27~33 2007-08-12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바울 사도는 자기 민족에 대한 탄식과 함께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에 대해서 말하면서 지난 시간에는 호세아서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백성이 아니라고 할뿐만 아니라 백성 아닌 자들을 백성이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신비를 이방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우리에게 증거 했었다.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들과 함께 복음 속으로 함께 부르시는 하나님의 예정과 역사를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근거로 선포하면서 이방인들과 메시야 예언에 가장 귀중한 선지자 두 사람의 글을 연거푸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호세야와 이사야의 예언이다.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25~26절에서는 이방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안에 불러들이는 것을 호세아의 글에서 인용했다고 하면,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는 심판에 처해지는데 반해서 오직 ‘남은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다룬다.

이 로마서 9장이 신약에서 가장 분명한 예정에 관한 사상이 나타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증거의 목표는 종말의 심판에 처할 자의 수를 영구 불변하게 확정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론을 패하고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또 무제한의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여 인간이 어떤 요구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비추어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오늘부터 다루는 9:30~ 10:21 까지에서 이스라엘의 책임과 죄를 다룬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그것이 선포하는 의를 열심으로 이루려 했지만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사람의 행위로 인한 공로에 따라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실패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거부하는 데서 드러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그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시고 완성하셨지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10:3) 그리스도는 부딪히는 돌이 되고 마는데…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마21:42, 44)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6~8)고 하여 같은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결국 꼭 같은 예수께서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그를 통해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시지만, 그를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핑계치 못할 심판의 이유가 된다는 말씀이다.

믿음은 보다 내면적이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면, 행위는 남의 눈에 쉽게 띄는 차이도 생각할 수 있고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는 실제적인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했으면 한다.



Ⅰ.부르신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작으며 그것 마져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27~29)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천국을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결론을 주셨다. 결국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그 부르심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결코 많지 않음을 성경은 지속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분명히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22:17) 약속하셨지만 이사야나 오늘 본문에 인용되는 대로는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는 하나님께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다만 연이어지는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듣는다.

인용된 말씀의 본문은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사10:22~23)고 기록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작정된 죄에 대한 심판은 어쩔 수 없으신 것이다.

이사야 시대에도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들은 무수하였지만(사1:12)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자들은 마치 참나무 그루터기에 솟는 움처럼 흔치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탄식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일 수 밖에 없으셨다.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28) 분명한 것은 이러한 소수의 구원이 하나님의 원하심은 아니셨지만, 범죄 한 인간 세계는 결국 제한 될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이스라엘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희귀함을 보면서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는 안타까움을 고백하고 있다. “남은 자” 라고 하는 표현은 분명히 많지 않은 수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9) 이 말씀 역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사1:9) 하였는데 그 남은 자조차도 사람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씨를 남기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2)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대로 둬도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을 우리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하신 사실을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면 목청이 터지도록 감사하고 찬양해도 모자랄 뿐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의 긍휼 때문임을 생각하면서 감사 드려야만 한다.



Ⅱ.하나님의 약속에 응답으로 순종한 것과 자신들의 의를 내세운 차이이다.(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율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육신의 안일과 무사를 위하여 헛된 우상들에게나 복을 빌던…, 율법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개처럼 취급 받던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것 하나로 혈통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종교도 다를 수 밖에 없는 구원 밖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의를 힘입게 하시고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신 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할까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요 율법을 받은 구별된 백성으로 뽑으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 때문에 버림을 당하는 비극은 또다시 우리들에게 경계의 교훈이다.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고 감탄을 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는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구원해 주셨다는 감격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라고 찬양한다.

이미 이 로마서의 첫 부분인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기준이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증거 한 바 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는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51:1)고 아브라함을 기억할 것을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부했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이유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하였고 다시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11:7)는 안타까움을 고백한다.

꼭 같은 도구가 올바로 쓰면 유용하지만 잘못 쓰면 흉기가 되는 것처럼 구원의 반석이요 증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사람들에게는 부딪혀 깨어질 돌이 되고 만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면서 나의 의를 내세우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 부딪힐 수 밖에 없고 깨어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경계요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이다. 모두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인정 받는 믿음을 가진 자들로 주님 오실 때까지 사는 …



Ⅲ.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가 되신다.(32~33)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인간의 자랑이 하나님께 얼마나 악하고 패역한 것인가를 성경은 거듭거듭 경고하고 있다. 인용된 말씀과 함께 이사야를 통한 두 곳의 말씀을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8:14~1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꼭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증거 한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1:2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명을 얻고, 인생의 의미를 알았고, 삶에 진정한 소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삶의 목표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망했다고 아우성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가 견딜 수 없다고 항의 한다. 애써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려고 하는 것은, 인정하면 왠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3~5)

오늘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떤 존재이신가! 생각만 해도 감격이 되고 눈물이 나고 기쁨이 되고 흥분이 되고 설래 이게 하는 찬양의 존재인가! 아니면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는 분이신가! 여기에 진실한 진단이 나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알게 할 것이다.

만약에 예수께서 “너의 가정에서 일주일간만 휴가를 보내고 싶다”고 하신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 평소 쉽게 사용하던 언어생활도, 잘 보던 TV의 연속극도, 주일날 자녀들을 교회가 아닌 학원이나 시험 치르는 곳으로 보내는 일에 대해서도, 눈치를 보고 있는 나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산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자연스러울 것이고 감격이 될 것이다. 다른 주님이 아니라 꼭 같은 주님께서 우리의 자세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왕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바울처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는 고백처럼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이신가!

그분 때문에 모든 세상적인 것이 가치를 잃고 그분만이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가![강복희 - 뇌종양으로 수술하여 한달간이나 의식을 회복치 못하고 중환자 실에 있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시고 또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고 말씀하셨다.

차이는 나의 공로를 내세우려는 것과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 라는 믿음의 차이일 뿐이다. 믿음이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 몸(삶)으로 반응하는 자세이다. 꼭 같은 사랑과 구원의 주님이 잘못된 자세에 의해서는 부딪히는 반석이 될 수도 있다.

시간에 따라 잊혀질 수 밖에 없는 행위가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순종하므로 여러분 모두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하고 견고한 모퉁이 돌’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