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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9장에 이어 계속해서 자기 민족의 불신의 안타까움을 고백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한계이다. 믿음생활을 잘 하다가 세상을 먼저 하직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뭐 고생과 더위가 없는 곳에 갔으니 감사하지요!” 라고 말해 보지만 그래도 안타깝고 애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정이다.
바울은 9장에서도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4~5) 라는 사실 때문에 더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냥 믿음도 율법도 모르고 이왕에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래도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율법을 받은 민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가는 것이 같은 동족인 바울의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갖게 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라고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좋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각장애자를 고친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 때문에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책망하신 바 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의 진리가 접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순종치 못함으로 불신의 사람으로 남는 것에 대한 경계의 교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가까이 있고 풍성이 있다.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은 마음에 있고 손에 들려져 있는 이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이스라엘과 같은 안타까운 모습의 사람들이 되지 않고 적은 깨달음이라도 온전히 순종하여 순종으로 오는 복과 칭찬을 넘치도록 누리는 …
Ⅰ.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소원.(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아 이방의 땅끝을 향하여 복음과 더불어 달음질하면서도 그의 마음에 늘 가시지 않는 안타까움은 자신의 민족의 구원이었다. 많은 교회들과 그의 사랑의 대상을 향하여 기도하면서도 끊일 수 없는 기도의 제목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의 원하는 바를 기도로 구하는 역시 실천하는 믿음의 모범을 그의 고백 속에서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 겟세마네 동산의 제자들은 마음에는 원했지만 육신이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을 우리 주님은 안타까워 하셨다.[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막14:38] 결국 마음에 원하는 것을 육신이 따라 주지 못하는 실천치 못하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 수 있음도 가르치셨다.
오늘 우리 각자의 원함과 기도는 과연 어떤 것들인가! 대개의 경우 우리 자신들의 삶의 형통과 무사 안일을 구하고 있는 우리의 연약함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의 위대함은 자신의 어려움이나 고통의 해결보다도 자신의 민족의 구원이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신앙의 차이와 깨달음이 되시기를 …
우리 마음의 소원과 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의 범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어린 아이일수록 본능적일 수 밖에 없고 장성한 사람일수록 그의 소원의 범위는 커가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세계를 품고 기도하라!”고 땅끝의 목표를 두고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소원하는 바가, 기도하는 바가 바울과 같은 큰 비젼과 이상을 가지고 양정동에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전 부산 도성과 대한민국, 그리고 땅끝의 한 나라들을 복음으로 감당하려는 소원과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는 대범한 하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 하늘의 사람들이어야 하면 땅에서 보면 옆의 산이 안보일정도로 아파트가 들어차 있지만 하늘에서 주님의 눈으로 내려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와 세계를 믿음의 사람들의 일터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울처럼 품고 기도하고 바라는 그런 하늘의 일꾼다운 능력의 사람들로 사시기를 …
바울은 바라고 기도하는 중에서 비로소 자신의 민족이 안고있는 부정적인 면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2) 라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네가 열심을 내라” 는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지 항상 강조되고 있는 우리의 믿음의 삶의 양식이다. 그럼에도 무지한 가운데 열심은 용감하다고 할지라도 잘못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계 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진리에서 멀어지는 열심이라면 더욱 심각한 것이다. 무식한 열심은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경계 되어야만 한다. 방향이 잘못되면 뛰면 뛸수록 목적지와는 멀어지게 된다. 특히 여기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 라는 ‘지식’은 단순한 들어서 알아지는 이성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헬, 에피그노시스(epignosis), 완전식별, 인정, 승인]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9b) 라는 데서 표현되고 있고 구약성경에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3)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가 무지하면 육신의 생명을 죽일 수 있고, 백성의 지도자가 무지하면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고, 영적인 지도자가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면 영혼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무지한 지도자는 안되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무지하지 않을 충분한 진리를 공급하신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에 늘 익숙하도록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지한 열심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이 아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면에서는 관념적인 지식으로만 채워진 체로 실천되지 않는 신앙은 바리새인들처럼 주님께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비극적인 진행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3)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자신의 기준과 생각으로 나름대로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열심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무지한 열심은 하나님의 진리와 더 빠르게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경계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각자 믿음의 사람들의 손에 각각 성경을 들려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주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읽지 않고 듣지않고 행하지 않으므로 주시는 기회들을 놓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최고의 지식과 문벌과 지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자랑했던 것이다. 이미 이 로마서의 서두에서도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고 증거 하였고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고 고백한다.
야고보는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고 경계한다.
믿음 안에서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오늘 내가 믿음의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 행한 어떤 업적도 사람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을 자랑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고 당부했고, 이것이 가능 하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라고 영적인 지식으로 움직여 질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같은 말씀을 주고 있다. 결국 이렇게 되지 못한 모습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3)는 바울로부터 지적 받는 이스라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Ⅱ.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4~5)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결국 구약의 제사 법전인 레위기18:5에 기록하는 것처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였고 사람이 절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율법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 라고 증거 함으로써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죄를 가진 사람이 의를 목표하고 행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거스르고 정죄하는 율법을 자신의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를 치뤄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지휘아래 종 노릇하고 있었던 사실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지적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
다만 그리스도는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완성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
Ⅲ.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6~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구원의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지식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먼 것이 아님을 확인하면서 역시 구약의 신명기서를 인용하면서 증거하고 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바울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이 하늘처럼 높아서 가져올 수 없는 것이거나 음부처럼 아무나 갈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나름대로 응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라는 것이 하늘을 올라가야 가능하거나 지옥을 내려가서 찾아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모든 인류를 대신한 죽음으로 음부를 맛보게 하시고 부활하여 죽음에서 일으키신 은혜의 역사를 믿고 순종하면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거듭남의 신비를 니고데모와 이야기 하시다가 홀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는 말씀을 하시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들려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연이어 말씀하셨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8)
요단강 동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말씀했던 그 말씀은 사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로 완성되고 확정되어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거 된 말씀이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새언약의 언약처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렘31: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3)
사실 완성된 새 언약 속의 복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 속에 성령과 함께 각자의 심령 속에 생명으로 함께 하시고 우리가 복되고 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 하면 사람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순종하면 된다.
이제 다음 주간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그 구체적인 순종이 어떤 것인가를 계속 말씀하고 있지만 이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기 어려워서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어디서든지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말씀을 좀더 가까이 이해해서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내 손에 있고 내 마음에 있는 성경 말씀이라”고 증거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중요한 부분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이나 기록된 것이 아닌 자신의 공로로나 또 명령하신 말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보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경계의 말씀이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몰라서 실천할 수 없었다는 변명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시대 보다도 일세기의 복음 시대보다도 더욱 분명하고 온전한 구원의 역사가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시대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펼쳐서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몰라서 잘 못 섬겼다는 변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은 완성되었고 모든 복음을 인하여 구원 받은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역사에도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모범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해서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될 뿐이다.
이왕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완성된 제사와 완벽한 진리를 받은 우리들은 오직 이미 주신 분명한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더불어 구원 받은 감격을 날마다 고백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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