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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을 해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님으로 고백하는 행위임에도 주님은 그런 자들이 천국에 다 들어 갈 수 없다는 사뭇 의외의 선언을 하신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복음 전파에 파견하신 후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는 일면에서 보면 전혀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신다.
주님의 이러한 지적은 오늘 바울 사도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마음에는 전혀 없는 믿음을 입술로만 하는 외식하는 자세를 꼬집고 계시는 말씀이 첫째로 지적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진심은 그렇지 못하면서 사람을 의식해서 그런 척 하는 모습을 가질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사람들 앞에 고백을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안팎을 다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그런 자세를 경계하시는 모습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마10:32~33의 말씀은 믿음이 있노라고 큰 소리 치면서 사람들로부터 & 세상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까봐, 아닌 척 하는 모습도 역시 경계 되어야 할 자세임을 말씀하신다.
뒤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1세기 당시 로마의 통치를 받는 당시의 사회상에서 ‘시져만이 주님이다!’ 라는 고백 대신에 권력을 두려워 해서 사람 앞에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없는 믿음이었고,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유는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생각에서였기 때문에 하늘의 생명의 약속을 진정으로 확신하는 믿음이 없는 데서 라는 얄팍한 처세술을 지적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온 열심이 아니면 헛된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할 만큼 멀리 있거나, 가까이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깝고 쉬워서 마음만 먹으면 구원의 진리는 마음에 있고 손에 있다는 부분에 대한 확신을 생각했었다.
오늘의 내용은 그러한 풍성한 복음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각자가 어떻게 누릴 수 있게 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부분이다. 다음 시간에는 이 믿음의 출처와 그것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다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수박 같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의 믿음이 아니라 겉이나 속 안팎이 꼭 같은 버섯과 같은 믿음으로 주님께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자신감과 하늘의 소망이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로 주님 오실 때까지 …
Ⅰ.믿음과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구원.(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세기에 로마정부의 반항자로 이스라엘의 이단자로 지목되어 사람들이 듣고 보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은 사실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구태여 로마의 군인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서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든 살아서 나중에 세상이 바뀌었을 때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느냐?” 는 합리적인 처세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른 믿음의 사람들은 이 고백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여기에서도 고백의 대상을 [예수]로 내용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즉,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의 제사를 완성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은혜의 역사를 자신을 위한 역사로 고백하는 내용이라면 고백의 도구로는 [네 입으로] 이다.
다른 사람들이 고백하는 뒤에 숨어서 간접적인 고백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입술로 고백을 드려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의 입술로 고백하기 전까지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주님은 되지 못한다.
특이한 것은 9절에서는 입술의 고백이 먼저이고 마음의 믿음이 후인 반면에 10절에서는 반대로 마음에 믿음이 먼저이고 입으로의 시인이 다음이다. 여기서 [시인, oJmologevw, homologeo]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바치는 믿음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감추어 두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임에도 당시로서 믿음의 행동이 입술의 고백이라는 것 때문에 고백에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행위로 표현되어지지 않는 믿음은 야고보의 가르침처럼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할 수 있는 신앙의 표현을 목숨을 바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가 [구원을 얻으리니,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결과라고 볼 때 과연 사회와 상황에 잘 처신하는 믿음도 믿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바울 사도께서 인용한 이사야서의 내용이 표면적으로는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시국이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急切)[당황, 경악; 낙담]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는 말씀인데 이 약속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현제의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의 약속임이 분명하다.
현실 속에서 육신의 무사 안일 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영원 속에서 당황하고 놀라고 낙담하게 될 것이다. 진리에 확신치 못하고 충성치 못하고 헌신치 못한 사람들의 후회가 많을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보다는 영원을 기약하는 것이고 현실을 넘어서 벌써 영원을 사는 것이다.
서두에서 주님께서 경계하셨던 거처럼 믿음 없는 ‘주여 주여’의 고백은 가증한 것이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거북이처럼 입을 거두어 들이고 고백하지 못하는 연약함도 결국 행위로 표현하지 못하는 주님께서 인정하실 수 없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 낸 같은 ‘믿음’ 이라는 말일 뿐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
Ⅱ.사람과 인종에 차별을 두지 않는 믿음과 구원.(11~1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조건은 “믿는 자마다” 일 뿐이다. 그 이외에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으시며 보시지 않으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9) 얼마나 감사한가!
11절은 이사야49:23b “…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인용이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수치와 사람에 대한 수치를 해결한다. 그 이유는 수치는 바로 죄로 인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뻔뻔해 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 십자가에서 져 주셨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겸손하고 온유할 수 밖에 없다.
인종마다 약점이 있고 그것이 부끄러움이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래서 문화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사람끼리 수치스러워 하는 것들이 또한 각각 다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욕은 인류의 모든 수욕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상이나 문화 교육은 사람을 차별한다. 사실 범죄한 세상에서 난 것들은 사람을 차별하기 나름이다. “너는 ~ ~ 서 함께 할 수 없다.” “너는 李가 이기 때문에 우리 金씨 문중회의에 참여할 수 없다.” “너는 수능 성적이 못 미치기 때문에 우리 대학에 들어 올 수가 없다.” “너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미국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너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너는 음악을 몰라서, 미술을 몰라서 …” 등등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엄청나게 많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그러나 하늘에서 난 복음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하였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모든 차별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범죄의 바벨 탑에서 흩어지고 차별 지게 된 언어와 인종은 오순절 날 천하 각지에서 모여와서 결국 하나의 구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적어도 이것은 바울이 확신하는 교회 속에서의 허물어진 장벽으로 남녀의 성적 차별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11:11) 종과 자유자의 간격도 허물어 졌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할렐루야!
이 13절의 말씀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2:32)는 말씀의 인용이다.
믿음으로 아담이 범죄 하여 수풀 속에 숨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의 수치를 벗게 되었고, 이러한 은혜는 문화와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는, 편견을 없애고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셨고 같은 믿음으로 마지막 진노의 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主]로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이다. 그 약속에 있음을 감사하는 …
그럼에도 믿음은 사람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만 온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그 경로를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Ⅲ.관계 속에서의 믿음.(14~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자세와 역할의 귀중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람은 마지막 때나 위기와 절망에 닥치게 될 때 주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서슴없이 주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은 오늘 천사들을 통해서 듣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로 통해서 듣게 하신다는 귀중한 사명의식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다.
1.믿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14f) 앞에서 말 한 것처럼 사람들은 죽음에의 상황에 다다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위기와 절망 중에도 기꺼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소 닭 보듯 하다가 나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만 구원을 호소 한다면 사람이라도 좋아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주님을 우리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 속에서 기쁘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평상시 아름다운 관계를 서로 나누고 있는 상황일 때 절망의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이기적인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주님을 종처럼 대우 하다가 위기 때는 더욱 종처럼 불러대는 우리 자신들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2.복음은 보냄을 받은 자가 전한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b) 이 말씀은 다음 주의 말씀에도 연결되어지고 있는데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구원의 이름은 먼저 구원을 맛본 자들이 비로소 전할 수 있다.
귀중한 존재로, 중요한 존재로 만남을 갖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중요한 존재로 소개할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실감나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말씀은 마치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이사야서를 읽으면서도 그것이 구원의 메시야를 말씀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빌립에게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행8:31) 라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청하는 에디오피아 내시의 모습처럼 갈증을 가지고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또 빌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의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면 이 내시에게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른 구원의 진리를 먼저 이해하고 감격하는 사람들은 또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확신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들고 기쁘게 산을 넘는 험한 난관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신다고 칭찬하고 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7)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각오만 한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고 또 사람들도 그 구원을 받았을 때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얼마나 감사하게 되는가! 마치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처럼 흔연한 인생이 되고 유쾌한 인생으로 변화를 받았을 때 얼마나 감사하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라는 말씀의 다른 일면은 말씀을 전하는 자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고백이다.
베드로를 청한 고넬료의 가족은 “…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b) 은혜 받기 위해서는 상대의 지위를 천사와 같은 위치로 두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씀 증거자들을 자신보다 신성시하고 받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마음과 입술과 행동으로 어떤 조건 속에서나 고백 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다 심지어는 과서의 죄까지도 문제시 하지 않으신다.
이 마지막 역사에 주님께서 이땅에 오실 때 우리는 인격적으로 가까이 대우하던 항상 감격하는 대상이었던 주님을 감격과 확신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진리를 전해야 한다.
오늘 나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들을 때 비로소 생명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고라의 가족처럼 망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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