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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입술로 시인하는 목숨을 담보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함께 할 때 온전한 것이며, 그러한 믿음으로 행하는 자라면 인종이나 사람들의 조건에 관계없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도 구원을 약속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절에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는 인격적인 믿음과 그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경로를 또한 나눈바 있다.
그럼에도 끝난 것이 아닌 것은 이러한 분명한 경로를 통해서 수없이 듣고 또 들은 이스라엘이 왜 복음에서 제외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오늘 본문에서부터 그 이유를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예정으로 이해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11장 말미에 가서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이 구원의 예정 속에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신비로 고백한다.
오늘 읽은 본문은 믿음이 어떻게 생기며 믿음이 생기게 하는 말씀이 어떤 것이며 그럼에도 이러한 원리가 어겨지는 이유조차도 하나님께서 이 죄악의 인류를 구원하시려 는 계획이라는 사실에 고개 숙이게 된다.
이를 오늘 우리 자신들 속에 적용하면서 신앙의 성장과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게 되는 경우에는 역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그 은혜의 자리에 채우실 것이라는 경계를 들으면서 우리 자신들의 믿음과 우리 각자를 통한 인류 구원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여 나를 포함한 우리 즉,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 대한 우리 각자의 역할도 가볍게 여길 수 없음을 교훈 받게 된다.
말씀을 열심히 들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키우고 주님의 구원의 계획으로 불러들이기를 원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열심으로 믿음의 삶을 나타내는 복된 삶들이 …
Ⅰ.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은 난다.(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어디에서 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반대로는 무엇을 증거 해야 하는가? 에도 역시 중요한 답변을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요한을 통해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복 있는 사람들이다.
1.믿음은 들음에서만 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는 생기지 않는가?’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은 교제를 통해서 생기지 않는가?’ 여기에도 확답은 없다. 믿음이 생기는 분명한 방법을 본문에서는 분명히 “들음에서” 라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5)고 연거푸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묻고 있다.
신앙을 처음 시작하려는 사람도, 계속 지금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도 이 원리는 불변의 원칙이다. 그래서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는 것도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 이다. 또 전도를 하려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게 해야 한다. 교회의 세상과 다른 좋은 분위기도, 사랑도 관심도 중요하고 좋지만 거기에서 믿음이 생긴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믿음은 들음을 통해서만 난다. 이 말씀을 뒤집어 이해를 해도 좋은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듣는 것은 꼭 예배 시간에 증거 되는 메시지 만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듣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의 첫 장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되신 말씀을 얼마나 잘 들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진리에 굶주린 자일 수 있어야 한다.
신령한 사람이라면 말씀이 들리지 않음을 인하여 탄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세상의 일에 너무 바쁘거나 힘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거나 듣는 것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복을 모두 잘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의 일도 잘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항상 너무 세상 일에 부대끼고 육신이 녹초가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 생활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인다면 우리는 진리를 듣는 것을 잘 해야만 한다. 만약에 주님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육신이 힘겨운 상태로 둔다면 우리의 영혼은 믿음이 점점 연약해 지고 말 것이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반드시 그런 장애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지 않고 힘을 쓸 수 있는 장사는 천하에 없다. 말씀을 듣는 것은 영적인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같은 원리이다. 그럼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믿음생활 하는 각자의 책임이다.
2.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 만이 믿음이 생기게 한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반대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 만이 효력이 있다. 세상에 그럴싸한 말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성경 말씀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고 말씀하셨다. 모든 성경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였고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아무리 유명하다는 철학자들의 말도 믿음을 주지는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사람의 말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데는 가치가 없다. 누가 말 한 것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조하지 못한다. 이런 입장에서 “누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데는 적절치 못하다. 성경의 진리는 초등 학문인 인간의 보조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다.
그러므로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는 교훈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말씀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풍성해지고 은혜를 충만케 한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라고 가르침으로서 말씀을 풍성히 가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각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책임이다. 즉, 들음이 각자의 책임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은 전하는 자의 책임이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듯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마15:9)다면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같은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고 하는 주님의 종들은 어떤 대상에게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므로 듣는 자들로 하여금 믿음이 자라게 할 사명이 있다.
만약에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있다면 믿음이 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줘서 듣는 사람들은 믿음이 생기고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눠주는 역할을 잘 감당하는 …
Ⅱ.그러나 중요한 들음을 헛되게 흘리는 경우도 있다.(16, 18)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을 증거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53:1) 라고 탄식하였다. 주님께서도 귀중한 말씀을 전하실 때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귀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고 실제적으로 시각 장애자는 이 말씀 조차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귀는 다 귀가 아니라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따로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6:61)고 안타까워 하셨다.
누가복음 11장에 신령한 비유를 베푸시는 주님을 향해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눅1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는 것도 분명 복이지만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 불쌍한 사람이다. 모두가 “아멘!”으로 말씀을 듣는데 나에게만 들려지지 않는다면 사실 탄식해야 할 부분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비유를 통해서 적절히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해설까지 해 주셨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9~23)
오늘 본문이 인용된 말씀처럼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4) 하신 것처럼 말씀은 풍성한데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비극이다. 때문에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듣는데 장애를 일으키는 요소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할 것이다.
모두가 풍성한 은혜로 들을 때에도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6:60~61)고 안타까워 하셨다.
분명히 일반 군중들은 듣고 기뻐 하는데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구원의 진리를 듣지 못함을 보시고 안타까워 하신 것이다.
듣는 말씀마다 은혜 되고 생명이 풍성한 양식으로 누리는 …
Ⅲ.결국 듣고도 순종치 않으면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된다.(19~21)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들을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에도 그것을 듣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본문에 인용되고 있는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신32:21)는 말씀으로 결국 다른 것들이 우상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이었다.
아내가 남편은 외면하고 다른 외간 남자의 말을 들으려 한다면 시기를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남편은 진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대개의 경우 다른 것들이나 일들이 말씀을 듣는 것 보다 귀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인하여 였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외면하고 듣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는 앞에서 지적한대로 세상의 일이 너무 지나쳐서 이거나, 전하는 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해서 이거나, 다른 일들이 듣는 일보다 중요하게 대두되었을 때 등등 그 이유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이런 선한 목적을 가진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이익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11장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머물지 않고 들으며 순종하는 자들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을 시기 나게 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그러한 자들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신 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9)
반대로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자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고 아시는바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
특히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거절되었다가 회복될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11:17~21)고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가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서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는 또 다른 대상을 향하실 수 있다. 물론 모든 인류가 구원의 대상으로 초청되지만 오늘 나 자신이 포함된 구원이어야 나 자신에게도 복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애절하게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권면하시는가!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21)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향하여 구걸하실 분인가! 이러한 사랑을 외면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게 될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만 나며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뿐이다. 천하의 듣기 좋은 별식 같은 이론도 우리에게 믿음을 주거나 키울 수 없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그 대상이 누구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매 순간 은혜로 다가오는 말씀을 헛되이 흘릴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말씀을 간절히 듣지 못함에 탄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나 자신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한다면 나의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 날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읽고 듣고 믿음이 나고 자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은혜에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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