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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복음과 자신의 동족이자 선택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어 오면서 과거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의 신비를, 미리 아신 자들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거기에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며 불신으로 반응하는 동족의 안타까움을 9~10장에 논한 바 있다.
이제는 과거를 넘어서 미래적으로 있게 될 인간으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에 감탄하면서 다시 회복될 이스라엘의 불경건 조차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인류를 향한 구원의 은혜의 신비임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 11장을 닫는 것을 보게 된다.
때로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증거에서 너무나 독선적으로 반응하며 곳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동족의 핍박을 바울은 견뎌야만 했고 안타깝게 호소하는 모습들도 사도행전 속에 자주 나타난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시거나 팽개친 것이 아니지만 결국 그들의 불신과 거역을 치료하시고 최종적으로는 구원으로 이끄실 것을 밝히는 이 11장의 신비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잘못 이해되어지기도 한다.
결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11:26~27)는 말씀이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전체적인 문맥이 바울의 동족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 데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이해가 될 것이고,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이 미래의 신비는 결국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고백하면서 감격함을 본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오늘 우리 역시 매순간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바울과 같은 감격을 고백하면서 주어진 삶을 날마다 살 수 있을 것이다.
Ⅰ.하나님의 약속은 바뀔 수 없다.(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사람들은 미우나 고우나 내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를 말하면서도 이 패역한 세대는 이 옛 약속이 무색할 정도로 도덕과 윤리의 약속에서도 쉽게 돌아서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수없이 배은망덕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사무엘을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12:22) 라고 하셨고, 시편에서도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시94:14) 라고 확인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배신하시는 경우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격상 절대로 그러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 역사의 수 천년을 반복하면서 되어온 역사적 사실이다.
바울 자신이 이방인이 아니라 그의 다른 서신들 속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인데도 불구하고 복음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확실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사실 자신의 경험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오늘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한 전도의 방법은 없다. 남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내가 만난 예수,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누리는 기쁨이 없다면 주님을 소개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삶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2f)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에게 확인 시키시기 위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선언하시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사실 모유 수유를 별로 하지 않는 요즘 시대에는 이 말씀이 별로 실감이 안 날지 몰라도 참으로 애절한 표현이다.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2b) 비록 자신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남았다고 이스라엘 전체를 고발하는 엘리야를 향하여도 주님은 오히려 변호하신다.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4) 공교롭게도 요즘 우리가 수요일 저녁마다 상고하고 있는 부분이다. 오죽하면 자신의 동족을 고발하겠는가 만 사실 자신만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은 바뀔 수 없고 수정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다. 이 불변의 언약 속에 있는 자신의 삶이 늘 확신 되는 …
Ⅱ.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본다.(3~6)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엘리야의 고발은 계속된다. 열왕기상 19장에 두 번이나 “…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 14)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오히려 패역한 이스라엘을 변호 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8)
오늘도 마찬 가지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들이 참으로 희귀하게만 느껴질지라도 역시 이사야의 때나 엘리야의 때와 같이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분명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은 절망할 상태이지만 주님의 눈으로 볼 때에 오히려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눈을 감고 주님의 눈으로 이 역사를 보고, 사회를 보고, 교회를 보고, 자신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세속화 된 눈에는 결코 어떤 소망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거듭난 주님의 눈으로 볼 때만 천국의 희망은 보이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 바울은 이제 천년의 세월을 넘어 당시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성경의 시대 속에서 같은 시각으로 오늘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시 같은 믿음의 눈으로 다시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시대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6) 그 때나 이때나 이 구원의 은총과 역사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만의 믿음 지킴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구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때의 엘리야나 이 시대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도 엘리야나 우리의 의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엘리야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고 선언하고 난 후에도 그를 까마귀로 먹이고 사르밧의 과부를 통해서 공궤 받게 하고 다시 천사의 보살핌을 입고 호렙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 라고 큰 소리 치는 것과 오늘날 그래도 내가 믿음을 지켰다고 큰소리 치는 것도 같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나 자신이 그래도 믿음을 지키고 바른 신앙 속에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은혜를 입은 것이고 더 사랑 받았기 때문이라는 고백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조차도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처지와 믿음이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는 …
Ⅲ.물론 인간의 완악함은 그 가진대로 보응을 받는다.(7~10)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그렇게도 대망하고 기다리던 이스라엘은 만나지 못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메시야는 반드시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는 허황된 꿈과 함께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외면하고 만다.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주장하는 의 때문이었다. 그런 자들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고 책망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개처럼 추하고 더럽게 취급하던 버려진 사람들과 오늘 우리들이 얻게 되었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게 된 자들의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또 다음 세대의 메시야를 외면한 이스라엘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모세는 40년간 광야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완악해진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고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29:3~5)
또 이사야를 통하여서는 모든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완악한 백성들을 비유해서 이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사29장)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13)고 책망 받는 백성을 향하여 이 말씀을 주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시에서 메시야를 대적하게 될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 같은 저주를 남겼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시69:22~23)
같은 표현을 스데반은 메시야를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고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7:51)
이러한 내용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하나님의 뜻과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인간의 죄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세우려 한다. 이런 이유에서 어느 시대에나 완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대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 한 후의 광야의 40년간이나 가나안에 정착하고 왕국을 이룬 시대는 물론이고 이 메시야와 복음의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늘 은혜에 의지하여 완악함보다는 순종으로 은혜를 입는 …
Ⅳ.이러한 넘어짐이나 실패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러한 인간의 완악함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 역사 속에서 중단되지 않는다. 이렇게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완악한 백성들의 거절을 하나님은 오히려 은혜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에서 동족들을 향하여 안타깝게 선언 하는 것처럼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28:28) 결과적으로 역사의 말미에 가서는 자신들의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이방인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기를 불러 일으키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절로 인류전체가 복음에 들어 오게 하신 하나님 이시라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의 충만해 짐은 오늘 우리의 표현을 빌린다면 “일도 아니다” 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마무리이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유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은 더욱 겸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2)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서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잘라내고 거기에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인 우리를 접붙이셨다면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베어내는 일이야 얼마나 더 쉽겠느냐고 겸손을 경고한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11:20~21)
이왕에 죄로 인하여 완악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완악함 조차도 반대편에서는 오히려 은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좋게 만드시는 천재이시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다메섹에서 붙들어 이방을 위한 사도로 만드시고 죄 투성이인 우리를 하늘에 백성 만드시고 이 죄악이 관영 하는 세상 때문에 오히려 해함도 상함도 없는 천국을 준비하신다. 이런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드시는 주님께 오늘 나를 드린다면 여전히 좋은 복음의 도구로 삼으시고 쓰실 것이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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