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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1:13~24 2007-09-16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우리가 어떤 건축 일을 하면서 다 마무리 한 후에 속에 잘못된 것이 발견되어서 겉에서부터 다시 부수고 안의 잘못된 것을 고친 후에 다시 부셨던 것의 돌이나 유리를 다시 시공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것이 완벽한 비유는 되지 못하겠지만 이스라엘을 잘라내었다가 다시 접붙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묘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방을 복음에 불러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잠정적인 계획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증거하면서 그런 이유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그런 이유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이 복음 속에 있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자긍해서는 안될 것을 경고하는 것이 오늘 내용이다.

바울 사도는 오늘 읽은 첫 절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 라고 감격을 고백하고 있다. 같은 로마서에서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5:16)고 자신의 버려져 있던 이방인들을 위한 중보자로서의 사역에 확신과 감격을 증거 하였다.

사울이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나니아에게 이끌려 왔을 때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에서부터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해를 끼친 바울에 대해 항의하지만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고 이미 바울의 나아갈 방향을 말씀하신바 있다.

나중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7~9)는 강한 확신을 고백한다.

자신이 이스라엘로부터 짐승취급을 당하던 이방인들을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십자가를 통한 온 인류 구원의 역사에 이방인들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바울에게서 오늘도 하나님의 일꾼 된 확신과 감격을 바울과 같이 고백하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귀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던지 바울과 같은 확신을 반드시 가져야 만이 귀중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 큰 일을 맡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라해 보이는 이름나지 않는 일을 맡아서도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생각된다.

오늘 나는 나의 맡은 일에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라고 고백하며 일하는가? ‘맨날 해봐야 표도 안나고 알아주지도 않고, 할 사람이 없어서 하고는 있지만…!’ 이라는 자세로 일한다면 얼마나 비극일까?

바울은 늘 감격하여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라는 고백으로 맡은 자리가 어떤 일이든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



Ⅰ.시기심을 일으켜서라도 얼마가 구원 받는 것을 고대하는 바울을 본다.(13~16)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자신의 이방인들을 향한 열심으로 자신의 민족들을 시기케 해서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대면하게 해서 소수라도 구원을 받게 하고픈 바울의 진심을 누가 알아 주겠는가! 비록 주님을 위한 사역의 중심은 이방인을 위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여전히 자신의 혈육들의 안타까움이 떠나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는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15f)이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이 모든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화해의 기회가 됨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령은 얼마나 애절했을까! 짐작하게 한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b) 했는데 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차이가 없이 모두가 죄 아래 붙잡혀있고 당연히 그 죄의 값으로 사망의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 온 인류라고 선언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 온다고 해도 이방인들과 다르지 않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이다.

죄의 수하에 떨어진 인류는 하나님을 알건, 율법을 지킨다고 하건, 또는 우상숭배에 붙잡혀있든 이미 예외 없이 죽은 목숨들이다. 히브리서의 선언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방인을 살리든 유대인을 살리든 이런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고, 그 도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이기 때문에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인이건 구원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이고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뿐이다.

모든 죄인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일치되고 부활에 하나가 되는 물과 성령의 거듭남을 통하여 회복되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관습을 통해서 이것을 확증한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16f) 추수할 때 처음 익은 곡식 가루이든 그 가루로 만든 떡이든 첫 것을 드림으로 그 다음 것은 다 거룩해지는 율법의 원리처럼(민15:20~21)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과 언약된 자자 손손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b)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거룩했다면 그 언약의 영양소를 누리고 있는 자손들인 가지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으로 거룩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좋은 어감이 아닌 시기심을 일으켜서라도 버려진 몇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는 바울의 심정과 같이 우리가 또한 같은 확신과 열심과 충성을 가지고, 아직 은혜밖에 있는 이방인으로 있는 가련한 영혼들을 복음 속에 불러들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



Ⅱ.꺾여진 가지 같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당부한다.(17~21)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고 잘 자라는 올리브나무를 모델로 삼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참 올리브 나무 밑동으로 이스라엘을 그 참 올리브나무 가지로 이방인을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로 비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접붙이는 일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거기에 원칙은 반드시 같은 종류의 나무이어야 한다는 것과 접붙이는 부분에 어떤 이 물질도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대부분의 밀감나무는 좋은 종자의 가지를 탱자나무 뿌리에다가 접붙이게 되는데 그것은 왕성한 탱자나무의 성장력 때문이다.

또 실제로 단감나무는 보다 생장력이 왕성한 다른 감나무 종류에 접붙여진다. 앞에서 접붙이는 원칙의 두 가지는 신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원숭이나 침팬치, 고릴라, 오랑우탕은 사람하고 비슷하게 생겼어도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 즉, 짐승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접붙임의 원칙은 접붙임 사이에는 어떤 이 물질도 들어가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여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뿐이며 같은 성품인 말씀과 성령 외에는 어떤 그럴싸한 인간의 이론이나 생각이나 감정도 오히려 접붙임을 실패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참 올리브나무 가지가 잘려지고서야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얻을 수 있었고 참 올리브 나무의 진액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경고 되는 위험성은 ‘자신이 접붙임을 얻기 위하여 참 가지가 잘려짐을 받았다.’는 교만이다.

아무리 접붙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참 올리브 나무뿌리에서 진액을 공급 받지 못한다면 말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야생 가지가 뿌리를 살아 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살게 하기 때문에 뿌리의 귀중성을 잊어버리고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이론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일지라도 그 아브라함으로 통한 메시야의 약속이 결국 있었기에 이방인인 우리가 구원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다시 “…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19)고 큰 소리를 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이 옳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꺾인 것은 ‘믿지않은 불신 때문’이라는 것이고 “너는 믿으므로 접붙임을 받았다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경계하고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고 야생 올리브 나무를 접붙이기 위해서 본래의 가지를 잘라 내실 수 있으셨다면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와 같은 이방인들을 잘라내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쉽겠느냐고 경책한다.

한마디로 이 말씀은 이방인 출신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하는 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래 자격이 없던 사람들이 어떤 자격을 가지게 되면 교만하기 쉽고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는 경고를 늘 머리에 두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오늘 나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은 전혀 자격이 없던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다는 감격을 흐리지 말고 늘 경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영광의 날까지 참 올리브 진액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이 누리는 …



Ⅲ.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증거 한다.(22~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두 낱말은 [인자, 헬, 크레스토테스(crestotes), (자비); 엄위, 헬, 아포토미아(apotomia), 단호함, 즉 엄격함, 준엄]이다. 이 두 낱말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성품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어도 이 [인자와 엄위] 라는 양극단을 함께 소유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사랑]과 [공의] 라고 쉽게 표현될 수 있고 죄의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속성을 다 감당해야만 하셨다.

그러나 죄의 속성을 함께 가진 사람은 이 두 가지의 속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는 있다고 하면서도 상황마다 적용이 엄격하지 못해서 하나님처럼 적용하지 못한다.

오늘의 과제에서 중요한 것은 이 속성을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선택하게 되는 데 그것이 곧 인자에 거할 수 있는 믿음과 준엄한 심판을 적용 받을 수 밖에 없는 불신의 두 가지 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고 준엄하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때에 한한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 (22-공동)

오늘 여러분은 어느쪽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누리려면 믿음에 거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만으로 인하여 불신과 불순종과 믿음을 버리는 것은 준엄한 심판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왜 우리가 믿음에 거해야 하는가 하면 접붙임을 받을 능력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믿음에 거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23)

요즘 Auto Door Lock 이라는 전자식 잠금 장치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잠금 장치는 일종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약속된 번호를 누르거나 지문을 읽히거나 키를 대면 [삐리릭] 열리지만 약속되지 않은 번호나 전자 열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문은 아무리 오래, 여러 번 갖다 대도 열리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빛과 소리를 낸다.

이 잠금 장치는 배터리만 있으면 거의 틀리는 일이 없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그렇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영락없이 천국은 열리게 되어 있다. 할렐루야!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15:2)고 확인해 주고 있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우리는 천국을 열기 위하여 하늘에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 다만 땅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는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오늘 읽은 마지막 말씀은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24) 라고 마무리 되고 있다.

본래 죄의 사람으로 어둠과 죽음과 더불어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호적을 빛과 생명에 옮겨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사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접붙임을 얻었다면, 본래 기라성 같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바탕으로 선한 교훈들을 들으며, 배우며 살아온 믿음이 바탕이 된 사람들이야 자기 조상들이 양분을 공급 받던 그 본 나무에 접붙이는 것이 얼마나 더 쉽겠는가 가, 이방인으로서 참 올리브 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것보다 얼마나 더 쉽겠는가 하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오늘 교회와 우리의 욕심내야 할 것은 모쪼록 얼마의 사람들이라도 진리에 불러 들이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의 골육지친(骨肉之親)의 친척들은 물론이고 알고 사귀는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원수 시 하는 사람들까지도 시기케 해서라도 복음에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저들이 시기할 정도로 우리의 삶이 정돈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먼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그런 복된 삶이 될 때 사람들을 시기케 하여 복음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꺾여지고 우리가 복음 속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늘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원 가지인 이스라엘을 꺾어내는 것 보다 우리를 잘라내는 것은 더 쉬울 수 있다는 경각심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철저한 겸손의 삶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참 감람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각자가 원하면 믿음 속에 들어 올 수 있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교만임을 알아야 한다.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믿음에 거할 필요가 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양면에 거할 수 있는 선택은 다만 순종과 불순종 뿐이다. 인자와 엄위는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고 그 양극단은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는 각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결정된다. 불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에 거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 하는 것이다.

언제나 원가지가 접붙임을 받는 것이 더 쉽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까지 열려진 기간에 이방 동족들을 구원으로 불러들이고 우리각자의 겸손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견고히 붙어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