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시간에 오늘 본문 7절을 우리를 받아주신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다루었지만 이 말씀을 좀더 이해를 좁히기 위해 번역한다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 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 들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7-공동) 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는 [열방]이라는 단어가 무려 다섯번이나 등장하면서 우리가 서로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열방을 구원으로 불러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교훈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접근하고 있다.
[열방, 헬, 에드노스(ethnos), 민족, 외국사람, 이방인, 이교도, 백성-롬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계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던 나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엡2:2!3)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 같은 이방 출신의 지체였던 나와 다른 사람들을 그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한 가족이 아닌 것처럼 서로가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결론부터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래도 같은 민족으로 한 문화권에 속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모든 열방을 주님께!’ 라든가 ‘땅끝까지 복음을!’ 이라는 구호는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속이는 부끄러운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두려운 경고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하신 至上最大 命令은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이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고 감격하여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가능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명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약한 형제와 자매를 받아 주고 수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귀중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Ⅰ.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의 민족을 먼저 받으셨다.(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주님께서는 뒷부분에서 다시 증거 하시겠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을 비롯한 믿음의 영웅들에게 주신 약속을 튼튼하게 지키시기 위하여 언약하신 사실들을 증거하고 또 확인 하셨다. 비록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을 지라도 “…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롬11:1~2) 라고 증거 한바 있다.
이 인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는 자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하여 오시고 피 흘리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4:31) 이러한 사상은 계속적으로 거역하는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어겨질 수 없으셨고 이미 앞의 9~11장에서 살폈던 대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약속을 철회하시거나 어기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도 제자들에게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더욱 분명히 하심을 듣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15:24)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셨고 베드로 사도까지도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3:25~26)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8-표준 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만 봐도 속이 뒤틀릴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언약백성을 위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는 신실한 언약의 성취자 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Ⅱ.주님은 열방을 구원으로 받아들이시기 위해 오셨다.(9~11)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백성을 위하여 율법아래 나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한 혈통으로 출발한 온 인류(행17:26)를 다시 복음으로 회복할 것을 이스라엘의 신앙적 영웅인 다윗의 선언과 율법의 대표자였던 모세의 신명기서를 통해서 확증하고 있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9f) 할례의 민족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그 미쁘심 때문이었다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함께 누리며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세상의 부모나 어떤 성인군자와 비교될 수 없는 긍휼의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그 긍휼에 의지하여 기도하고 회개를 빌게 된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긍휼을 크게 경험했던 다윗은 고백하기를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0~14) 할렐루야!
“…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b) 여기에 인용된 말씀도 다윗의 고백이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삼하22:50) 이 시의 시작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삼하22:1)라고 되어 있고 다시 시편에서도 같은 고백을 드리고 있다.(시18:49)
즉 모든 주변 국가들을 비롯하여 자신을 원수시 하던 사울의 손에서조차도 구원하신 상황에서 드리는 감사의 시면서, 반대의 입장에서는 비록 이스라엘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성군인 다윗의 통치를 받게 된 상황이 되었을 때이다.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을 드리며, 주의 이름을 찬미합니다”한 것과 같습니다.”(9-표준 새)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10) 바울은 다윗의 선언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인지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받아서 준 모세의 선언을 인용한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신32:43)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이끌어 내면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5~6)고 약속을 주신바 있다.
이 말씀은 동일하게 오늘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약속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언약을 잘 지키고 신앙이 성장해서 연약한 형제를 받아주고 수용하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그리스도인) 구별된(거룩한 백성)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열방 즉 믿지 않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다음 주에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먼저 소개하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6) 이 역시 바울 자신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구원 받은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런 자세가 없이는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귀한 말씀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즐거워 하는 사람들임을 전제로 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는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1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시117:1) 그러므로 종국적으로는 모든 이방인 세계에서 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만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7:9~10) 라고 찬양하는 광경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오늘 우리(나)의 구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음을 잊어버린다면 바리새인들과 같은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려면 연약한 주변의 형제 자매들부터 받아주고 용납함에 출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
Ⅲ.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두에게 소망의 하나님이시다.(12~13)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제 다윗과 모세를 통해서 열방을 구원으로 불러들여 찬양케 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약의 선지자의 대표격인 이사야를 통해서 다시 확인을 한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0)
1.모든 인류의 소망의 뿌리는 이세의 뿌리 곧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하여 짐승과 같이 되었고 진정한 소망을 잃어버려서 죄와 사망의 절망 속에 잡혀있고,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 저주의 쇄 사슬에서 자유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세의 뿌리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다시 진정한 인간 됨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죄와 저주를 친히 십자가에서 담당 하심으로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의 약속을 인하여 기쁨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언약 역시 이미 앞에서 말씀한바 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2.하나님은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이 채우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시다.(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을 전함에 있어 너무 두려운 분으로만 말하는 경향이 있고 아이들에게도 그런 감정으로 가르치게 되는 경향이 많다.(기도시간에 눈뜨는 아이…)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기자는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시71:14)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소망의 하나님만이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믿음 안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충만이 채우신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13f) 소망의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채우시는 ‘주체’이시고 그 좋은 것들이란 ‘모든 기쁨과 평강’이며 채우시는 장소는 ‘믿음 안에서’이고 채우시는 상태는 ‘충만케’이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도 같은 교훈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2)이 소망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충만케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b) 소망은 사람이 바란다고 넘치는 것이 아니다. 소망을 넘치게 하는 주체도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이다. 소망은 절대로 기분이나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능력으로 넘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12장의 어리석은 소망을 본다. 16~21절에 한 부자의 소망의 근거와 구체적으로 이 부자의 소망이 기록되고 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그러나 다음절에는 일순간에 그 소망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
소망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스스로 미래를 소망해 보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확실한 소망을 가진 자만이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그 여유는 자신만이 아니라 옆의 사람들에게도 부드러움으로 다가서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각박하면 그 답답함이 역시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주게 된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 역사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선택과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택 받았다는 한가지로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약속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대에는 자기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셨지만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모든 열방을 다시 복음으로 불러 들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수 만리 먼 땅의 우리들에게 까지 복음을 허락하셔서 절망의 백성들이 소망을 가지게 하셨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감격과 기쁨과 소망을 가질 때 비로소 나에게 가치 없게 여겼던 형제를 자매를 받아들이고 함께 같은 소망으로 가도록 협력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우리가 육신의 형편대로만 서로를 대한다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관계가 좋은 사람들과만 관계하고 교제 하겠지만,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요 죄와 죽음의 절망 속에 있던 우리들을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엄청난 사랑을 기억하고 헤아린다면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이 화평케 하신 은혜를 넉넉히 나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