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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날 이 땅에 성령의 오심으로 세워지고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더해가는 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령을 속이고 인간의 명예를 나타내려 했던 사탄의 부추김이었다면, 교회는 다시 성도 상호간의 관계를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하려는 또 다른 시도의 마귀 사탄의 간교한 역사는 사도들의 구원의 복음 선포를 방해하고 중지 시키려는 도전을 시도했다.
이렇게 역사 속의 교회는 직접적인 위협과 공갈 협박으로 복음증거를 중단시키려는 산헤드린공회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의 역할을 통해서 물론 지금까지 계속 되면서 또 다른 측면에서도 안팎으로 진리의 선포에 대한 방해는 끝없이 계속되었음을 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귀 사탄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길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도 전제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절대적으로 말씀과 성령을 의지할 때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사탄의 공교한 술책에 알량한 사람의 수완과 방법으로 대치 한다면 그럴 경우는 100% 실패하고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계를 역사 속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보면 교회는 2:41에 3천명이 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4:4에 ‘오 천명’ 그리고 5:14에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기하급수적으로 세포분열을 계속하면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되었다.(5:28)
이런 성장에도 불구하고 5장에 나타난 성령을 속이는 일에서 이제 파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구제의 일이 편파심을 일으키고 서로 원망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이 은혜의 교회 속에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끊임없는 어두움의 세력에 교회는 늘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 대응하고 그런 문제를 신속히 해결함으로써 더 심각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주님의 교회에 무엇이 귀중한가도 늘 점검되어야 한다. 교회가 구원의 진리를 증거한답시고 구제나 사랑을 잃어버려도 안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구제 때문에 잃어진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기능적인 면에서도 이런 모든 것들이 규모를 따라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건전한 교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Ⅰ.성령이 충만하고 성장하는 교회에도 문제는 있었다.(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우리는 때로 짐짓 많아지는 수(數)의 마력에 정신을 잃을 때가 많다. 그것이 사람이든 재물이든 다르지 않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많아질 때 반드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검증하는 경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을 때 역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의 문화나 사람의 형태를 볼 때 이런 일은 충분히 문제가 생길만한 여지가 있었다. 성경의 이름들을 보면 헬라식 이름이나 히브식 이름,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식 이름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당시의 상황적인 면이기도 하면서 본문의 경우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한 것으로 봐서 매일매일 교회는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식물이나 그 비용을 나눠준 것으로 이해가 되고,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파당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경계하는 부분이다.
물론 꼭 부정적인 분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지만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9) 그럼에도 고린도전서1:10~13에서 바울은 파당의 나눔을 경계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모습까지 분명하다.(요17:21~23)
특히 서로를 원망하게 된 원인을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라는 것으로 봐서 먹고 사는 육신의 문제임이 이 일을 해결하려는 사도들의 모습에서도 분명하다. 즉 육신적인 일들이 영적인 문제에 어려움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이런 일은 어쩌면 피해갈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또한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 파당의 문제로 일어난 일은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즉 자기와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일이 영적인 진리에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 우리는 오늘도 쉽게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쉽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하고 원망부터 하는 시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역시 원망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칭찬될 수 없는 항목으로 원망은 듣는 것도 하는 것도 다 경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4: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원망의 특징은 [원망, 헬, 공귀조(gongguzo), 불평하다, 투정하다. 20:11]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 하고 만족을 모르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원망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말하고 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가르는 데 있어서 원망만큼이나 무서운 적도 없다. ‘누구 때문에~’(사울)
결국 지상의 교회는 완벽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성령은 감사를 가르치지만 마귀 사탄은 끓임 없이 원망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이간시키고 분열시키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충만한 사람에게는 원망이 침투할 수 없다. 여러분 모두가 감사를 풍성히 누리므로 원망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우리교회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
Ⅱ.교회의 일은 늘 성령의 충만과 하늘의 지혜로 가능하다.(2~6)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결국 어떤 것일지라도 인간적일 수 없다.(성령의 다스림이어야만 한다.) 그럼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찾거나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 잡혀있던 사도들은 이러한 상황을 즉시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속한 해결을 시도하는데 역시 성령의 가르치시는 방법을 의지함을 본다.
비로소 이 사도행전 속에 ‘제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2)라고 고백한다. [제쳐놓고, 헬, 카탈레이포(kataleipo), 버리다, 포기하다, 남겨두다; 마4:13(떠나)]; [공궤, 헬, 트라페자(trapeza), (네 개의 다리를 가진)식탁, 상(床); a table; 마15:27(주인의 상); 눅19:23(은행); 행16:34(음식)] 다행히도 성령의 사람들인 사도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하며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가를 바르게 판단한 것이다.
사실 오순절 날 이 땅에 세워진 초대교회는 말씀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밥상공동체 즉, 애찬도 매일 나눴음을 본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2:46)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또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일을 나누어 감당 함으로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3~4) 나중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교회의 공식적인 집사 직의 자격은 아니지만 이내용이 모토가 된 것은 사실이다.
결국 나눠주면서 원망을 듣지 않도록 그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당할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 데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고 이것은 적어도 이 일뿐만 아니라 만대(萬代)에 오고 오는 역사 속에서 교회가 일꾼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이다.
분명히 그 일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인도하는 것도 아님에도 이 일을 맡길 사람들의 선택의 기준이 높은 영적인 자격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나쳐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가의 기준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빌3:3)
결국 교회 속에서의 공궤하는 기준이 혈연적(血緣的)이거나 학연(學緣)이거나 지연(地緣)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다면 굳이 말을 만든다면 천연(天緣)과 신령(神靈)한 혈연(血緣) 즉,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이유이어야만 할 뿐이다.
또 이 말씀은 섬김의 자세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사람의 감정이나 계산된 이성도 아닌 성령으로 통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본연의 임무를 회복한다.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3b~4) 사도들은 애당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라고 했던 것처럼 처음 주님께서 이 사도들이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일러 주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즉 세상 땅끝까지 그리고 이 역사의 종말까지 말씀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간곡한 말씀이셨다. 이런 성령의 목적과 역할은 사도들은 다시 확인할 수 있었기 대문에 이러한 간교한 사탄의 술책에서도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다.
사도들은 말씀을 가지고 죄에 죽을 인생들을 섬기고 그것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역시 기도하는 것은 필요불가결 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구제의 역할이 적절한 분배를 위해서 제자들을 이 일에 등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교회는 공궤하는 일에 등한해도 된다는 가르침은 분명히 아니다. 교회의 기능에 있어서 다른 면은 역시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주님을 섬김으로 오는 육신의 삶에 대한 필요도 감당해야 할 부분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나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런 가르침이었다면 사도들은 이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이러한 의견을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5f)한 것도 평상시 사도들의 모범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모습이고 역시 사도들의 주문대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5) 일곱 사람이 뽑혀지고 그 중에 두 사람은 그들의 계속되는 행적이 이 사도행전에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도에 한결같이 순종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고 이러한 순종은 어떤 문제든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본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순종이라는 단순함이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거나 말씀하실 때에 사람의 생각대로 이것저것을 헤아리고 변명하고 핑계하는 대신에 말씀 그대로를 순종하고 받드는 것이 바로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라는 말씀이다.
방법에 있어서 사도들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3) 하였고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을 비롯한 일곱 사람을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5~6)는 협력과 조화를 보는 데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교회는 사도들의 요청대로 사람을 선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이것이 주님의 교회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들을 세우는 모범이다. 앞에서 말한 어떤 사람의 관계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계의 개입이 전혀 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기준과 모든 사람들의 함께한 선택 그리고 영적인 위탁이 안수와 기도로 완성되는 모습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함께 성령께 의지하고 선출했기 때문에 거기에 시비거리가 있을 수 없고 또 뽑힌 사람들이나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도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또 이 일곱이라는 수에 있어서도 앞에서 본 것과 더불어 생각할 때 오늘의 직분자 선택과 더불어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숫자와 거기에 비례되는 직분자 수의 비례를 볼 때 역시 오늘과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교회들이 고민해야 할 모습이다.
교회의 모습이 영적인 말씀의 가르침과 전례보다는 인간적인 것이 개제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고 문제를 만들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달란트와 은사대로 일이 바르게 맡겨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진리를 어기는 것이 될 수 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직분자 선택 문제를 앞두고 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 정예화(精銳化) 되어야 하겠지만 공식적인 직분의 선출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하거나 또 선택되지 못한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는 자세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적인 기능에 있어서 어떤 부분이든지 활성화 되고 바르게 되어야 하는데[예배(교제), 선교(전도), 구제(봉사)] 물론 이 모두가 균형을 가져야 하고 어느 부분에 치우치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한 일을 즉시로 개선하는 것을 본다.
결국 교회의 힘을 구제에만 정력을 다 소모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지만 예배만 있고 전도나 봉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교회의 균형을 잃는 것이 됨도 경계해야 한다.
어떤 경우 우리는 한 부분에만 치중하기 쉬운 약점을 가지게 되고 그 잘 되는 것 만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자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모습이다. 주님의 교회가 진리뿐만 아니라 은혜도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데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으로 부단히 기도하고 힘써야 할 부분이다.
사실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이 지상의 교회들이 이런 부분에서 더러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오늘 본문에서처럼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들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여 예배(교제), 선교(전도), 구제(봉사)도 균형을 갖지 못한 다면 건강한 교회는 될 수 없고 결코 하나님의 바라심도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도 바른 성경으로 환원이 이루어져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치우침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구성원 된 우리 사람들도 기뻐하고 바른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는 …
Ⅲ.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세상에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어두움의 도전에 직면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런 문제들을 바르게 해결하고 치료함으로써 계속 바른 성장을 가져오게 됨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짐짓 말씀을 등한히 하게 될 뻔 했던, 잠시 동안이라도 시험에 빠졌던 교회는 그것을 성령의 지혜에 의지하여 회복함으로 나타나는 결과들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배우게 된다.
“②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③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④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는 모습이 그것이다.
교회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바로 말씀의 왕성(성장)이다(그것은 믿는 개인에게나 공동체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위적이 아닌 말씀의 성장으로 이루어지는 이 교회에 그들의 반대자들까지 복종하게 되는 것을 본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하는 모습이다.
참으로 쉽지 않은 부분이고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왕성이 쉽지 않을 것임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즉, 불법이 성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이 오히려 왕성하게 된다는 데서 안타까워해야 할 부분이다.
진리와 은혜(공의와 사랑)는 하나님께 있어서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말씀이 왕성하면 결과로 사랑이 증가하여야 하고 그러한 결과는 다시 반대자들을 굴복시키는 열매로 결실하게 되는 것이 바른 성장이고 모습이다.
성령이 왕성한 교회에도 시험은 있었고 분파는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라는 기관에 있어서 반드시 치료되어야 할 모습이고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로 회복이 가능하다. 아니 이런 시험의 회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는 세상의 지식이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보이는 물질의 공궤조차도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칭찬 듣는 사람들을 뽑아서 하나님의 교회의 불균형이 해결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수시로 발생하는 문제들이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해결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공통체의 반대자들까지도 굴복시키고 더하심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와 각자의 믿음이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는 은혜의 역사로 충만할 수 있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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