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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된 중풍병자인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에서 죽어있는 경건한 여제자인 다비다를 되살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믿음의 확신을 주고 믿음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를 지중해 연안으로 순방케 하신 진정한 이유는 거기에 머물지 않음을 오늘 본문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직접 이방인의 구원을 체험하고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이 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이 일이 예루살렘 교회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데 예루살렘에 돌아간 베드로에 의해 사도들에게 보고되고 먼저 복음 안에 있었던 제자들을 확신을 시키게 되는 내용이 다음 11장 서두에까지 계속된다.
가이사랴는 욥바의 북쪽으로 약 5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예루살렘과 비슷한 거리로 해변 도시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데로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40)는 것으로 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구원시킨 후에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중에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고 있을 때, 빌립은 이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본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행21:8)
오늘의 제목인 “이 약속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는 선언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고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 각지로부터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 능력을 보고 놀란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했던 베드로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는 자신을 통한 이 하나님의 선언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는 가운데 주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강제로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이끄심으로 이 선언을 성취케 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방인 구원의 계획을 알게 하시고 실행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상주해 있는 경건한 로마 군인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처음 오순절에 자신들이 받았던 성령을 그 가정에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을 분명히 보게 하신다.
Ⅰ. 하나님은 참으로 세심(細心)하시다.
하나님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창조하신 것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과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마찬가지로 주님의 하시는 일은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없으시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던 사울만 거꾸러뜨린 것이 아니라, 이미 그를 위하여 아나니아 라는 주님의 종을 준비하셔서 그에게도 사울을 변화시킬 환상과 계시를 주셨던 하나님은 아직도 이방인 구원을 확신치 못하는 베드로와 최초로 구원의 모델이 될 이방인인 고넬료 양쪽을 세심하게 준비 시키심을 깨닫게 된다.
구원을 누리기에 합당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맞을 준비를 천사로 통해서 하시는 반면에는 베드로에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환상으로 고넬료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오늘 날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어떤 사람들에게 억지 같은 일을 시키시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은 억지나 모순보다는 순리를 기뻐하시고 억지의 복종보다는 기쁨의 순종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세심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님의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몬1:14)
그래서 억지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연보도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고후9:5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벧후3:16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예배나 기타 신앙의 모든 행위들을 기쁨으로 즐겨 하도록 바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하나님이나 모두가 세심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고 조밀하게 예비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자신들은 억지로 하려는 시도들을 더러 한다는 사실이다.
세심하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준비하시는 하나님, 억지가 아니라 순리를 따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 …
Ⅱ. 천사의 지시를 받은 고넬료.(1~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로마의 흔한 이름인 이 고넬료(Kornelios) 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오게 되었으며 어떻게 믿음을 가졌는지는 기록에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의 믿음 하나는 본받을 만하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예수께서 계실 때, 이방인으로 백부장 두어 사람이 등장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한결같이 존경스러운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마8:5~13; 눅7:1~10; 가버나움의 하인의 중풍병을 말씀만 하여 고쳐달라는; 막15:39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물론 이 사도행전의 뒷부분에서도 바울과 관련된 백부장들이 나타난다.
1. 고넬료의 경건.(1~2)
이탈리아 즉, 로마 군대의 백 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린 중대장 격의 군인으로 피 지배국인 이스라엘에 주둔하는 장교였을 것인데, 군인이라고 하는 규율과 정신무장으로 로마에 충성을 가져야 하는 군인으로 이해할 때 의외의 인물이다. 이 사람은 신앙의 기본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본다.
①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더불어 인정을 받는 모습은 쉽지 않다. 특히 자신의 부리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그들과 삶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나중 베드로에게 와서 자신의 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22)라고 종들이 칭찬하고 있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자신의 종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주님께 호소한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8:6) 했고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 오늘 본문의 백부장도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7b~8)는 내용 속에서 종졸들과의 관계를 마치 형제 같이 의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②백성을 많이 구제하고-식민지라고 하는 피지배국의 백성들로부터 욕을 먹기 일수인대도 오히려 권력이나 완력보다는 구제로 그들을 돌보는 사람 이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눅7:4b~5) 라고 종의 중풍병을 함께 아파했던 백부당과 다르지 않았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22)
군인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모습에서 대단히 존경할 만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36년의 일본 강점기 후에 남아있는 일본 순사와는 너무나 다름을 본다.
③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앞의 두 가지의 존경스러운 모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경건한 삶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서 어찌 보면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구별된 삶이 외부적으로 나타난 모습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바울 사도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을 들어 보지도 못했지만 “항상 기도하더니” 라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결국 이 사람의 신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인정받는 것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체험.(3~6)
이 사람은 유대인들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3)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신앙행위를 인정받는 가운데서도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4) 전쟁터에서는 두려워 할 줄 모르는 군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경건을 였볼 수 있다.
천사가 주는 확신은 고넬료의 신앙적 행위가 하나님께서 아시는 바 되었다는 확신을 듣는다. 이러면 다 일 것 같은데 하나님은 뜻밖에 당부를 하신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5)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베드로 사도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하는 보고의 내용에서 들으면 왜 자신을 부르도록 하나님께서 지시 하셨는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11:13~14) 이 말씀으로 비춰 볼 때 우리가 언 듯 이해하기 어렵지만 고넬료는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아직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아시고 예비하신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하나님의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은 고넬료 라는 사람을 아셨고 때가 되매 부르신 것이다.
3. 천사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하는 고넬료.(7~8)
고넬료의 의심할 바 없는 이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는 끝까지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환상 중에 나타난 천사의 지시를 듣자말자 즉시로 그 명령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그의 경건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환상을 본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7f) 고민도 의심도 하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으로 곧바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 하는 것을 본다.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7b~8) 신앙의 진가는 즉각적인 순종에 있다.
Ⅲ. 베드로를 준비 시키시는 하나님.(9~16)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만 지시하신 것이 아님을 본다. 고넬료를 구원으로 이끄실 계획을 하신 하나님은 아직도 고넬료보다도 이방인의 구원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납득할만한 기적을 통해서 그의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이방인의 부름에 사양치 않도록 같은 신앙적 환상으로 준비 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결코 애매하게 어렵게 가르쳐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분명하고 명료하게 알려 주시지만 다만 죄와 어두움에 닳고 찌들어 완악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이 분명한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희미하고 어려울 뿐이다.
1. 베드로의 기도.(9~10)
고넬료의 보낸 사람이 욥바성에 가까웠을 때 마침 베드로 역시 낮 12시에 드리는 정기 기도를 지붕위에서 드리고 있었고 하나님은 이 기도를 통해서 베드로의 할 일을 보이신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닥쳤기 때문에 베드로는 시장기를 느꼈던 것 같고 그러한 욕구는 자연스런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가 되었다.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10)
2. 베드로에게 주신 환상.(11~13)
기도의 깊은 경지에 하늘이 열리는 신비를 보았고 그 내용은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최대한으로 묘사할 수 있는 베드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당연히 온 인류를 포함하는 이방구원의 사실을 묘사한다고 하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소식은 하늘로서만 주어진다. 이 범죄 한 세상의 어떤 소식도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한다.
진기하게도 “네 귀에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는 묘사는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인 십자가의 대속적 희생을 완성하시고 부활 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東西南北 坊坊曲曲 땅 끝까지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을 베드로에게 다시 확인 시키시는 의중이 계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12) 라는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율법의 관습대로 부정하게 여겨 먹지 않았던 생물인 것은 그들이 부정한 생물처럼 여기는 이방인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13) 부정한 것을 가장 강하게 경고하는 표현은 [접촉]보다도 [먹지 말라, 레11:1~23; 신14:3~21]는 경계였기 때문에 “먹으라”는 당부로 이방을 받아 드릴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베드로의 한계.(14~16)
여기서 고넬료와 베드로가 비교되는 것은 고넬료는 전혀 의심치 않고 천사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한데 반해서 사도인 베드로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더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먹으라!” 하시는데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14f) 라고 응답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14)
이것은 어찌 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아직 오래 되지 않았지만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별로 계산 없이 “아멘” 할 수 있는데 신앙의 경륜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주님의 명령에 “그럴 수 없나이다.” 라는 베드로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베드로의 자세에 주님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 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들을 우리가 ‘부정 하다’라고 하는 일들은 더러 있다. 이것은 적어도 성경과 우리의 생각의 간격 같은 것이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말씀은 곧 인격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16) 베드로에게 한번 두 번으로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유대사람들이 확정할 수 있는 세 번씩이나 반복되었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옛일에 돌아간 베드로에게 세 번을 확인을 받으셨던 것을 기억해 내게 할 수 있는 효과를 주신 것 같다.
하나님은 참으로 조밀하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다 잊어버려도 기억하고 계시면서 사람들의 구원을 주시기 위한 말씀조차도 참으로 순수하고 분명하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18:30)
천사의 구원의 지시를 받은 고넬료의 신앙은 가까운 집안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부리는 종 졸들로부터는 물론이고, 자칫 밉게 보일 수 있는 지배국의 국민들에게 까지 인정받는 하나님께서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된” 경건의 사람으로 사람들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경건을 가졌고, 그러므로 주님은 그와 그 가정이 구원 얻을 말씀을 가진 자를 보내 주시기 위하여 천사를 통해 그의 영혼의 삶을 지도하셨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보고 들은 베드로는 오히려 하늘의 말씀에 민감치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조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오늘 나(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
오늘 이 말씀은 같은 이방인들로 긍휼의 약속에 의해서 주님의 구원을 누리게 된 우리에게 두 가지의 도전을 주신다. 같은 이방인으로 고넬료와 같은 가정과 사회와 하나님 앞에서 경건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는 구별됨 삶을 본받아야 할 우리들이다.
베드로처럼 이미 믿음에 있다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거룩케 하심을 의심치 말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시는 하나님의 판단기준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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