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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18~25 2010-01-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세상의 원리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택하셨다면 참으로 억울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런대도 역시 하나님은 이 우주의 주인이심이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누구에게도 편견 없이 그의 백성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권력과 그리스의 정신이 지배하던 1세기만 해도 사람의 머리로 판단하고 사람을 선택했다면 그야말로 요즘처럼 머리에 붉은 줄 질끈 매고 한 손 추켜들고 “구원쟁취”식의 대모가 빗발 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로마의 권력에서 그리스의 철학에서 유대인의 종교의 우월에서도 변명할 수 없는 기준으로 모든 죄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당시의 旣得權者들에게는 불만이 나올 만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처한 입장보다 낳은 것을 구하고 요구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공평함도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공평한 것은 되지 못한다.

오늘 날에도 이것은 다르지 않다. 세상의 이권과 관계, 그리고 형편을 따진다면 오늘 이 자리에 저를 포함해서 태반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바울은 당시의 모든 이권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에다가 최고의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키워진 최고의 인텔리,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어느 문화나 학문, 정치에서도 뒤질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대도 다행인 것은 당시에도 최고의 기준에 서있는 바울이 그러한 자신의 이권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편에 섰다는 것이고, 사실 그것은 바울의 원한 바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었다.

그래서 바울의 증거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만한 것이었다.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하고 말하면 사실 호소력이 약하다. ‘저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성토를 하는 것이다.’

이런 바울이 당시의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도 대단한 하나님의 지혜이고 가치였다. 오늘도 이러한 바울의 호소가 어떻게 당시에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를 생각해 보자.



Ⅰ. 세상의 기준을 뒤바꾸는 지혜 …(18~20)

십자가의 [도, , logos, 말씀, 예수 그리스도, 요1:1; 요일1:1]의 신비를 증거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꼭 같은 이 생명의 원리가 이미 정해진 사람의 형태에 따라 이해되는 것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멸망하기로 준비된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 , moria, 불합리]은 당연한 것이다.

당시에 헬라 철학에서도 로고스는 최고의 우주적인 원인이자 모든 것의 본질인 인격체라고 믿었는데 최악의 사형도구인 십자가와 로고스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부정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들에게는 이 세상적인 不合理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결국 세상의 지혜와 총명이 영원의 세계에서는 쓸데없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래서 세상에서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이 하늘에서는 큰소리 질 수 없는 존재들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공평하신 섭리이시다.

세상의 기준은 사람의 지식의 판단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어야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지식의 기준을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뒤바꾸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상의 최고의 기준은 ‘능력, 지혜, 선비’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입장에서 비웃는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부르심으로 세상의 가진 것들을 오히려 헛되게 만들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불러 들이는데 공평케 하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신령한 것에 관해서 지혜가 있다.”고 큰 소리 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런 입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는 주님의 증거가 인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늘의 신비한 지혜를 가진 자는 없고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는 유대의 서기관들조차도 자신들이 계속해서 베껴 썼던 율법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어서 그 율법에서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20f) 결국 인간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고 자랑하던 헬라의 지혜였던 철학도 영원의 세계를 욕심내보지만 결국 쓸데 없는 것이었고, 종교적으로 앞서있다고 율법을 들어 자랑하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논리를 이해하거나 나타내는 데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결국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한계에서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인간의 틀에 갇히고 말고 무한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의 모든 틀을 허물어 버리고 하늘에서부터 시작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다.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편견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덕택에 헬라의 지혜자들도 아니고 히브리 율법을 알지 못했던 오늘 우리들조차 이 십자가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



Ⅱ. 세상의 편견을 뒤엎는 하나님의 방법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다루는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11:34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고 말한바 있다. 바로 뒤에 가서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전2:16f) 하였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 사람의 머리로는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오묘한 사랑과 섭리를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사실 세상이 가진 지혜는 어두움의 지혜, 악의 지혜이기 때문에 이 지혜의 도구를 헛것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특히 여기에 쓰인 ‘이 세상[, kosmos, 창조된 질서 우주,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해 오고 있는 세력의 영향아래 있는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구원의 방법은 물론이고,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데는 왜 그 신비한 지혜의 방법을 쓰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어리석고 완악한 세상에 보다 효과적인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시면 효과 면에서 사람을 통한 비효율적인 전도의 더딘 방법보다 큰 효과를 나타낼 것 같은데, 그러한 방법을 쓰지 않으시고 구태여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이 방법으로만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이것 역시 앞의 말씀과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일세기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면 역시 당시에도 가장 존경 받던 철학자들이 먼저 구원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들은 제외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지식, 무식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하게 하심으로 편견 없이 공평한 은혜를 모두가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는 가난과 부요, 무식과 지식자가 너무나 많은 차별대우를 받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는 이러한 차별을 없애시고 오히려 가난한 심령을 더욱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이 놀랍고 귀한 구원을 역사 속에 끝날까지 펼쳐가시는 것이다.



Ⅲ.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공평한 지혜 …(22~25)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모두가 다르다. 가난에 찌들려 본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보는 것이 꿈이고, 무식으로 설음 받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무식을 벋어 던지고 사람들에게 유식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온 갓 애를 다 쓰는 것들을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보아오는 사실이다.

돈 좀 실컷 벌어 쓰다 죽었으면, 무식하다고 설음 받는 데서 무시하는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놓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가짜 학위라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부의 피해자나 지식의 피해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소원들이다.

이런 입장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①표적의 민족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통해서 살고 계속 표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집요하게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16:4)고 거절을 하셨을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23f)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하니 참으로 거리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순절 날에도 베드로 사도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고 저들의 허물을 지적하면서 구원으로 초청하였다.

오늘도 무엇인가 신비한 것이 있어야 그럴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거짓 표적을 통해서 유혹하는 마귀의 올무에 넘어갈 수 있는 위험성도 그만큼 많은 것이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12)

표적이 아니라도 십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감격할 수 있는 신앙이야 말로 참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믿음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②지혜를 자랑하는 그리스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가장 처참하게 죽이는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그렇게 약하게 죽은 사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가 저들의 의문이었을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③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인종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2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즉 인간의 계급과 지혜를 던지고 약하고 어리석은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방법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되어 주시고 지혜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하나님은 절대로 어리석을 수 없는 지혜의 근본이시다. 그럼에도 상대적인 사람에 비교하여 “지혜롭고”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피곤을 모르시는 분이시지만 역시 사람의 한계에 상대해서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시고 이런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놀라운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원의 지혜를 통해서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를 부끄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원의 지혜를 통해서 적어도 구원의 은혜 안에서 세상의 편견을 뒤집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원의 지혜를 통해서 세상의 추구하는 것들의 가치를 뒤집어서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미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믿음으로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표적을 구하던 사람도 지혜를 찾던 사람도 모두 만족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