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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26~31 2010-01-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바울 사도는 당대 최고의 지혜자 들이라고 자랑했던 그리스인들이나 세계 어느 민족도 갖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유대인들의 종교로 추구하는 표적도 결국 하나님을 아는 데는 가치가 없었고 오히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가장 비 효율적인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 편견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이었다는 사실을 지난 주에는 이야기 했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고린도전서의 첫 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간 이성으로는 우월하거나 좋은 태생의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어째서 하나님은 저런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실까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오히려 저들의 시대에 자랑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신비를 증거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 친자식보다 입양한 자식을 더 사랑하고 위하는 것을 보면 친자식의 입장에서는 ‘왜 부모가 저러실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느끼는 입장과 같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헬라인들이 볼 때는 무식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큰소리치고 전도한다고 설치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고 무식한 것들이 큰소리 치고 설치는 것을 보면 가관이 아니군!’ 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방법은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나 은혜가 그런 사람들 속에서는 소화가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이나 믿음에 관한 것들은 머리로 이해 하려고 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 이성을 인정치 않으시고 전혀 독창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오직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십자가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용서고 긍휼이고 은혜이다.

바울은 앞에서 증거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고린도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한다. 오늘 우리를 볼 때도 주님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기준에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에 대한 찬양을 드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 증거를 보게 된다. 이종배 같은 사람이 전도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앞의 모든 내용은 사실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자 하는 내용이고 감사라는 데서 이 바울의 찬양과 고백은 오늘 우리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다.(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 부르심은 사실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교회(Ekkesia)라는 말 자체가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다. 지난 구역 공과에서도 공부를 하였지만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 사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세상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요한 복음12:42~43에서 나눈바 있다.

이 세상의 가치와 터전의 중요성을 천국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역시 주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사실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면 쉽게 던져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럴싸한 것을 쥐고 있는데 보기에 그보다 못한 것을 주겠다고 하면서 현재 가지고 잇는 것을 버리라고 하면 그렇게 할 사람이 사실 드물 것이다.

신앙 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나 오늘에나 마찬가지로 ‘육체를 따라’ 즉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그럴싸한 사람들이 오히려 적다. 그렇기 때문에 또 자격 없는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이 문제없이 주님께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마 나 자신만 해도 가정의 문제가 없었고 어려서부터 모든 것이 평탄하고 잘 풀렸다면 주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을 사람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는 말은 ①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 ②정치적인 힘을 가진 권력자. ③좋은 가문에서 난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최근에는 좀더 가깝게 번역하기를 “…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표준 새)

아니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이 세가지 부분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복음으로 불러들여도 잘 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주님 안에 있다면 더욱 감사 드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도 변변치 못한 사람들을 부르셨음에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우리 주님의 사람의 기준과 갖지 않음을 본다.

그래서 세상 속의 사람들이 현재적으로 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하늘을 향한 눈이 떠져야 하고(요3:3) 영혼의 눈이 떠 졌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르심이 이 세상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고 바울은 기도하는 것이다.

대단하지 못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귀한 하나님의 자녀 만들어 주신 것에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



Ⅱ.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다.(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기 두절 속에서는 “택하사[헬, 에클레고마이(eklegomai), to select, pick out; 뽑아내다, 선택하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3) 라는 말을 세번씩이나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뽑힘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믿음에 거하는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주님께 선택 받았다는 자긍심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하심을 읽게 된다.

주님께서 12 제자를 선택하신 것도 당시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조롱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끓임 없이 사도들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갈릴리 사람]이었음을 본다.

신비한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는 사도들을 보고도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2:7)고 조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택하사, 택하사, 택하사” 하셨는데 이 뽑은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뽑아내셔서 있는 것들을 없애려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세상의 기준의 정 반대이다.

세상은 결혼을 해도, 친구를 사귀어도, 사업 파트너를 택해도 자신보다 낳은 사람을 택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이 쓸데없다고 생각하고 버리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뽑으셔서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라는 표현은 당시 고린도에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고 오늘 어떤 지역이나 교회가 서면 복음에 먼저 부르심을 받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연약한 사람들임은 현재로서도 검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힘과 권세와 지혜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주님을 ‘선택하심’과 ‘폐하심’의 주체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최고의 권력가나 철학자나 높은 벼슬을 했다고 해도 얼마나 감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위에 계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데서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



Ⅲ. 주님만 자랑하게 하시려고 …(29~31)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선택하셨을까? 누가 봐도 바보 같은 선택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뜻이 있고 이유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만약에 그럴싸한 사람,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시키셨다면 주님의 어떤 위대한 역사조차도 자신의 능력으로 했다고 우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의 영광을 다른 것에게 양보하거나 잃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또 마땅히 그러셔야 할 분이시다.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들을 뽑아서 세상에 크고 위대하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변화를 시켜 놓으면 그것은 분명 자신들의 능력과 권능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자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역사 속에는, 아니 우리 대한민국 속에서만도 조금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만 해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을 자랑하여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그들은 그들의 분량대로 잘못된 신앙으로 그들의 생을 마치고 또 마치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적어도 그것은 기본이 안된 인생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비록 과거에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었지만 세상과 비교될 수 없는 위로부터 거듭나서 어두움과 어리석음의 속임의 명수인 마귀 사탄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받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셨다.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오셔서 이 하늘로부터 난 자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찬양하고 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철저하게 포기 하시고 겸손의 극치를 보이신 것을 우리는 빌립보서2:5~에서부터 본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것이야 말로 겸손의 극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연결되어지고 있다.(9~1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1) 이것은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는 말씀의 인용이다.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과 위엄과 능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성령을 주셔서 깨닫게 하는 것을 자신의 위대함으로 위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만이 자랑거리요 편견 없는 사랑과 절대적인 공의로우심을 세상에 행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자랑을 삼는다면 잘못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바울을 통해서 하시는 것도 더욱 더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종배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도 호소력이 약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서 이 세가지를 다 가졌던 바울로 하여금 그것을 온전히 버리게 하고 부정하게 하고 다시 바닥에서 시작하듯이 이런 고백을 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세상적으로 그럴싸한 사람은 많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 강한 것들,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려고 오늘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으므로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