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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로 앞 단락에서 사람을 따르는 것이 분파를 만들게 되고 사람의 지혜대로 행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시며 복음 속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것이 다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 어떤 직분이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하기 위한 것이라는 절대적 신앙의 목표를 제시한 후에 자신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평가 조차도 대수롭지 않으며 복음을 위한 일꾼이라면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줘야 하고 일꾼이라면 당연히 주님께 신실함을 드려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평가들에 대해 자신은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을 평가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별로 대응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 조차도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이것이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하고 또 자신 조차도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조차도 평가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최종적인 평가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참으로 의연한 사람으로 주변과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최종적인 판단을 존중하는 선언을 만인 앞에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많은 영향력을 만들어 놓은 아볼로에 대해서 조차 바울은 한마디도 비난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분파라고 하는 것은 당대의 훌륭한 사람들은 그것 자체를 원치 않지만 그런 사람의 주변에 모여있던 소인배들이 자신의 스승이 아닌 대상을 잘못 이야기 하고, 자신이 추종하던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려는 데서 발생하는 것을 본다. 또 사람들은 그래야 자신 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것으로 착각하고 자주 이런 어설픈 행동으로 오히려 자신의 스승을 욕 먹이는 예들은 오늘의 사회 속에서나 정치계파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각자가 할 수 있도록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분명히 제시 하셨고[롬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계시된 진리에 견고히 선다면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딤후2:19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드러내셔서 참과 거짓을 분명히 밝혀주실 주님의 오시기 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자세로 의심 없이 나타난 진리에 최선을 다하면서 마지막 오셔서 받을 칭찬을 기대하는 바울과 같은 자세를 견지하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나는 어떤 자세의 사람인가를 살펴서 자신에게도 거리낌이 없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의 기대 속에 기다릴 수 있는 바울과 같은 충성된 신앙의 사람 되시기를…
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김과 맡은 자의 충성.(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울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3:23)고 선언하고 그와 같이 [헬, 후토스(houtos) 이와 같이, 그러므로] 라는 말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두 가지 당연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①그리스도의 일꾼, ②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으로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요 그리스도의 일꾼인 자신을 포함한 선언이다. 또 이것은 오고 오는 역사 속에 계속 세워지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일꾼으로, [헬, 휘페레테스(hyphretes), hypep, hypop=아래, 밑에+ eretes 노젖는 것(배의 아래에서 노 젖는 것) 하위 뱃사공, 하속, 수종자] 쓰여진 낱말이다. 3:5에서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사역자로 표현을 했다면, 여기서는 영화 [벤허]에서 본 바 있는 겔리 노예선의 밑바닥에서 베를 젖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 라는 표현을 쓰면서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 즉,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라는 배를 젖는 노예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교회나 방주로 묘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그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할 해야 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헌신하는 일꾼들은 보이지 않아야 하고, 오직 모두의 열심히 노 젖는 사역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만 보여야 하는 것이 그분의 몸 된 교회이다.
문제는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와 온 세계 속의 교회에서 항상 그리스도보다 보이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나타나려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일꾼들은 보이지 않는 배 밑에서 그리스도를 움직여가는 마치 헤엄치는 오리의 발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응분의 상을 세상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 속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을 비롯해서 이종배는 물론 모든 주님의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천국에 까지 이끌어가기 위해서 배 밑창에서 끊임없이 노를 젖는 희생을 받아드리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그리스도의 일꾼”이 희생적인 면이라면 여기에는 은사적이고 달란트적인 면이 있다. 여기 비밀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밀[헬,뮈스테리온(mysterion), 신비스런 종교의식, 신비]” 즉,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의미하는 데, 특히 “맡은이 의미하는 것은[헬, 오이코노모스(oikonomos), 가정 관리자(집사), 능력 있는 고용인, 국고 대리인(고지기), 하나님의 종, 시종, 청지기] 각자의 달란트와 은사에 합당하게 주어진 자격을 의미한다는 데서 앞의 [휘페레테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꾼은 이 두 가지가 다 고려되고, 검증되어야 하고 이렇게 검증된 일꾼이라 할 때 교회는 그러한 일꾼을 마땅히 여겨야 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검증되어 세워진 일꾼일지라도 여기서 끝나지 않음이 다음 절에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말씀과 성령으로 검증되고 세워진 일군이요, 모든 교회가 마땅히 인정하는 일꾼일지라도 거기서 만족할 수 없고 세워지기 까지와 같은 충성과 믿음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많은 일꾼들이 세워지기까지는 최선을 다하다가 세워진 후에는 안일해 지는 안타까움이 없어야만 한다.)
여기 “충성은 [헬, 피스토스(pistos), 신실한, 믿는, 신뢰하는, 확신하는, 진실한 faithful, believing] 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꼭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졌다면 지위나 입장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하며 충성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아무에게서나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충성된 사람, 믿음의 사람에게서 만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당부하기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일꾼으로 선택되었다면 보이지 않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젖는 노예들처럼, 구원의 신비를 맡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면에서는 은사나 달란트로 인하여 맡겨진 일임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같이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를 잃지 않고 충성하는 것이 교회나 일꾼 자신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Ⅱ. 사람의 판단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3~4)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성령과 더불어 해온 일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런 것이 자신의 의로움이 될 수 없다는 단호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같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도 그래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 순간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마지막 운명이 다할 때까지 그래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3f) 즉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신앙생활 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사람의 반응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습이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또 바울이 끝까지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반응에 민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의 사람이고 신령한 사람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 권에까지 도전을 해왔고 그것이 너무나 심하여 마침내 바울을 존경하던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데까지 가게 되자, 결국 바울은 고린도후서 말미에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우들의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서 나중에는 사도 권에 대한 항의를 한다.
사람의 반응에 흔들림이 없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고 특히 직분 자들은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건으로 흠 잡힐 데가 없는 경건에서 그래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연이어서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3b~4f) 사람들의 판단이나 비난은 대단히 주관적이어서 거기에 신경 쓰다 보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판단에 허물을 보이지 않는 당당함이 신앙인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신령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책망과 판단을 받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고, 자신이 늘 이런 진리에 민감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2:15)고 앞에서 선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바울 사도의 겸손은 다음의 말씀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b) 아무리 사람들에게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주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또 늘 마지막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모습이야 말로 주님의 일꾼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올바른 신앙의 태도이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b)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어떤 일을 하든지 마지막 주님의 판단이 남아 있다는 자세로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바울이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것은 모든 시대의 복음의 일꾼 된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섬김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스스로 책망 받을 것이 없는가 살피는 삶 가운데서 미래의 주님의 칭찬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5).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모든 판단의 근거를 두는 바울 사도의 신앙을 보게 된다.
여러분 모두가 현재적으로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성도의 삶을 살고 미래의 영광의 약속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되시기를 …
Ⅲ. 최종 판단은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오늘 마지막 말씀은 우리 모두의 현실에서 신앙의 삶의 자세와 자신이 절대적으로 당당할 수 있는 근거를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5f) 사실 죄의 속성을 가진 우리 사람들은 자신이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하면서도 판단하기에 너무나 조급하다. 묵묵히 의를 행하면서 판단은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자세를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5m) 주님께서 오셔서 가려진 부분까지를 치우고 마음 속에 감추어 둔 것 까지도 드러내고 나타내실 것이라는 자세는 죄악의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령한 삶의 이유를 가져다 준다.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 이유가 없다. 속이고 감추고 허풍 떨고 싸우고, 그러나 이런 것을 다할 수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드러내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5b)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주실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게 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책망도 각 사람에게, 칭찬도 각 사람에게이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가정에 났기 때문이거나 어느 교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임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일꾼들과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배 밑에서 그 배를 위해서 노를 젖는 노예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움직여가는 일꾼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맞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비밀인 십자가를 맡겨주셨다는 자긍심으로 일해야 하고 그렇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모든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판단 받을 삶을 살지 말아야 하지만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하고 사람의 판단에 민감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해야 한다.
어떤 억울함이나 안타까움이 생길지라도 급하게 해명하려 하는 것 보다 주님의 최종적인 판단과 상주심을 기대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은 감추인 모든 것을 들어 내시고 마음에 품은 생각 까지도 들어내셔서 의로움을 증거해 주실 것이다 이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영광스러운 영원의 세계를 기대하고 일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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