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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도요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서 자신이 전해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 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고 유치한 세상의 관습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바울의 권면에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강한 말투로 권면했던 바울은 이제는 좀더 친근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타이르듯 사랑의 음성으로 다시 다가서고 있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단속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권위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으로 인하여 하늘의 백성으로 다시 났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대한 부모와 같은 염려와 안타까움으로 권면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는 읽게 된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신앙에 있어서 스승으로 가르치려는 사람은 많지만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자식을 걱정하듯 마음을 쓰는 사람들은 당시의 1세기나 지금이나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사도인 바울은 저들에게 결코 창피를 주고자 해서나 기를 죽이고자 이런 안타까운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님을 사실을 들어서 증거하는데 참된 하나님의 종이요 성령과 말씀을 두려워하는 주님의 참된 종이라면 당연할 것이다.
사실 참된 부모라면, 자신의 자녀의 수치를 들춰내어 사람들에게 떠벌리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감추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바울은 지금 그런 심정으로 고리도의 영적 자녀들에게 간청을 하고 있는 애정 어린 호소를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듣는다.
오늘도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신앙에 대한 책망을 듣는다면 그런 사랑을 바탕으로 한 권면으로 이 말씀을 들어서 고린도 교회처럼 망하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에 순복 할 수 있는 …
Ⅰ. 아버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14~1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야단을 맞아도 참으로 사랑으로 권면하시는 자신의 부모와 그렇지 않은 책망은 분명히 다르다. 바울 사도는 지금 신실하지 못한 많은 교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인해서 모두는 아니지만 자신의 말에 의심을 품고 듣지 않으려고 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에게 보다 진지하고 다정하게 다가서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14f) 오직 상대의 비리를 들추어서 자신이 그들보다 낳은 사람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이렇게 선거철이 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정책이나 삶의 철학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후보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춰내어 선거에서 이기려는 사람은 사실 올바른 정치가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이 고린도 전서의 다른 데서는 편지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도 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6:5)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15:34)
그러나 바울의 진심은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b) 그 이유를 다음절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b) 앞에서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3:2)는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고 또 이것은 갓난아이에서부터 자신이 양육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인데,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이런 활동들이 바울이 아닌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증거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냥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라고 주님의 희생의 십자가가 저들을 거듭나게 한 시작이요 바탕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다른 교사들하고 다른 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15f) 일세기에는 참된 복음의 스승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고린도에 나타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자신들을 따르게 한 거짓스승들도 많았음을 고린도 전, 후서에서 보게 된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는 분명한 숫자가 아니라 많은 상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가르치는 진정한 교사는 바울을 비롯하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거짓 스승들은 책임 없이 저들의 마음을 그냥 뒤흔들어놓고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바울은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이고 진정한 교사는 아버지였다.(우리 나라와 같은 면이다.-이 시대에 진정한 아버지를 잃어 버려서 교육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교육으로서의 모델이 아니라 돈 벌어다 주는 기계)
오늘도 부모의 심정으로 권면하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더욱 성숙해가는 …
Ⅱ. 자신을 모범으로 제시한다.(16~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은 단순히 큰 소리치는 허풍쟁이 아버지가 아니라 참으로 모범으로 교육하는 스승임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을 모범으로 삼을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오늘 두 번째의 말씀이다.
6f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 증거한바 있다.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서를 비롯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을 본받을 것을 당부한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1:1) 빌립보서3:17에서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당부했다.
다른데도 있지만, 가장 신앙적으로 활발했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3:7, 9)
신앙에 있어서 본보다 좋은 교육은 없고, 그 본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본받는 디모데를 보낸 이유를 말한다.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7b)
여기 디모데 역시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를 전달케 하기 위해서라고 증거하고 마치 예수께서 성령의 오심을 두고 말씀하신 것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했는데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결국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성령과 더불어 일했고, 디모데는 물론 오늘 모든 주님의 사자들도 자신이 만든 가르침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입으로 나온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 그리고 부활하셔서 당부하시고 하늘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을 늘 생각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사역이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고 그 모범을 행함으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자랑스럽게 설 수 있는 …
Ⅲ.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18~21)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이 부분에서는 좀더 단호한 말투를 보게 되는데 5장에 이어지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합당치 못한 저들의 삶을 책망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불신자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고린도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이제 사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영원히 보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고, 오히려 스스로 교만하여졌음을 바울은 안타까워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다고 말하면서도, 여기에 단서를 달기를 역시 바울답게 “주께서 허락 하시면…” 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앙은 말에 있지 않음을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말씀하신바 있다. 가르치면서도 삶은 그 가르침과 다른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23:3) 라고 지적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당부하기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당부한바 있다.
사실 [말]과 [능력]이 다른 것처럼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니다. 말은 잘 할 수 있고, 모양은 낼 수 있어도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지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은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먹고 마시는 육신의 부유(富有)에 있는 것으로 오해를 가지고 있는 로마교회를 향하여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증거한 바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는 검증은 천국이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말은 전달받을 수 있지만 삶은 눈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적 삶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가서 확인해 보겠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9만리 장천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모시고 사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 안에 이미 극락은 존재하는 것이다.(탕자의 아버지 집과 이방 땅에 빈털터리가 되어 있을 때)
오늘날 청산 유수같이 교회를 이야기하고 신앙생활를 말하고 권면하면서도 삶은 불신의 사람들보다 못한 잘못된 신앙인들을 불신의 사람들이 보면서 ‘그런 하나님의 나라라면 너나 가라!’고 빈정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허황된 이상에만 사로 잡혀있는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는 바울은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21)고 저들의 잘못된 신앙의 삶에 매질을 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사실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갖지 못한 체로 선다면 ‘사랑과 온유’의 위로로 만나지 못하고 심판의 매를 받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함께 사는 능력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죄와 상관없이 믿음을 따라 능력으로 산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온유’로 오실 것이고 허약한 종교인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을 변명하는 허약한 사람들에게는 심판 주로 오실 것이다. 결국 오시는 주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경계를 교훈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 했으면 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5~39)
진정한 신앙의 권면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권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모범을 본 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39f) 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살 때 그 삶은 벌써 성령의 능력에 읶쓸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이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능력의 삶이 되는 것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모두가 말로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삶으로 자신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긴 후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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