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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지난 4:21에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이미 고린도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현한바 있다.
비록 고린도라는 도시가 온 갓 종교의 범람으로 영적 세계가 혼란하고 도덕적인 타락으로 사람됨을 거절한 마음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그러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단호한 말투로 그러한 고린도의 죄악에 그대로 물들어 있는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고 교회가 죄를 짓고도 그런 사람들이 용납되고 큰소리치는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고 야단치고 있는 모습을 오늘의 내용에서 읽게 된다.
교회는 분명 세상에 있어야 할 기관이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세상과 같은 모양과 방법이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께 영혼들을 구원하여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구별된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신들의 노여움을 가라 앉히기 위해 있다.)는 세상에서 큰 재앙이나 어려움 없이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 나름대로의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하고 섬기는데 이것은 영원에는 관련이 없는 대부분 세상에서의 삶을 보장 받고자 하는 기복적(祈福的)인 것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창조주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 세상을 버리고라도 영원을 보장받고자 해서 이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것이 다른 종교와 다르고, 죄인 된 사람으로서는 이 일이 스스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구원을 보증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 형통만을 위해서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들을 하며 세상의 형통을 추구하는 데서 진리가 아닌 거짓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여전히 세상 속에서도 명예와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바울은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을 지적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책망을 싫어했고 오히려 대항하려 드는 인간적이고 정욕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또 어두움의 세력은 완전히 성경의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속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모습들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적인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고 거역하고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 없고 어두움의 종 노릇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상이 교회에 들어와 있어서 이것을 쫓아내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바울 사도께서는 이 5장에서 두 번씩이나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2)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13b)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성도와 세상은 섞여 살 수 없다. 세상에서도 지탄을 받는 행위들이 교회에서 행해진다면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짓밟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다른 면에는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실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한 냉정한 심판이 있었듯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은 죄에 대한 판단을 분명히 하여 경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 5장 나머지 부분에서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해야 할 것을 말하면서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세상은 타락하여 죄를 밥 먹듯 하고 있지만 거기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적으로는 서운할 수 있고 융통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분명한 가치와 기준을 가지는 지리의 성도와 교회로 사시기를 …
Ⅰ. 교회는 세상의 윤리를 초월한다.(1~2)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법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 법을 무시한다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육신의 한평생을 세상의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에 목표를 두고 적어도 세상의 가치 그 이상을 목적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세상의 도덕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법이 바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사는 하늘의 백성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풍성하다고 자랑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조차도 하지 않을 비도덕적이고 부끄러운 일을 교회에 구성원들이 행하고, 또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덮고 넘어가는 것은 영적인 삶의 원리를 지도해온 바울 사도로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사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 유치하고 초라하고 부끄러운 삶을 합리화하는 삶의 원리가 아니라 모두 도덕적인 항목들이라는 데서 영적인 삶이란 절대로 비도덕적일 수 없음을 갈라디아서 5장은 가르치고 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음행은 부부간 이외의 부적절한 관계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넘어오면서 이방인으로서 복음에 들어온 성도들에게서도 요구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가 금지해온 4가지 조항의 한 항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20) 성령의 열매에 반대되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결과들 중에 하나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갈5:19)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속에 행해지고 있는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으로, 이것은 꼭 음행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의 중책을 맡기는 사람들에게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3:7)는 당부를 주고 있다.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음행의 종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사실 “아버지의 아내”는 ‘어머니’일 것인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서모를 두고 하는 말로 이해되어 지는 것으로 OT 율법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죽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레20:11)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 속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2) 죄가 교회 안에서 관영 하는데도 죄진 자들이 교만해지고 “통한히 여기지[헬, 펜데오(pentheo), 슬퍼하다, 탄식하다]”지 않고 그러한 자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 조차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행되는 곳으로 죄인을 불러 용서를 받게 해야 하지만, 다시 세상의 죄를 반복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교회를 보면서 혀를 차게 되고 당연히 주님께 욕이 돌아가게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이다.
다음 장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6:2f)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고서야 어떻게 세상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안타까움이다.
우리 모두 말씀을 따라 진리와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교회로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
Ⅱ. 구원을 위하여 부정은 징계되어야 한다.(3~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몸은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우들과 함께 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비록 고린도 교회에 있지 않지만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 이미 판단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3)
역시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것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판단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의 이름이지만 그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정죄되어야만 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고 바울의 가르침은 여기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심은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육신의 기준이 아니라 영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을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부분이 이 5절이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어쨌거나 성도였던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교회 밖으로 내어 쫓았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데 같은 표현이 한 곳에 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20)
무엇보다도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성경과의 조화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성경은 언제나 전인적인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데살로니가전서5:23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같은 바울 사도께서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이 말씀을 앞의 문맥과 더불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 음행한자를 결국 교회에서 추방함으로써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게 하여 그의 삶을 회개하게 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얻게 하자는 말씀이다. 이것은 결국 그의 육신의 수치감을 되찾게 하여 회개할 수 있게 함으로 최종적인 기한을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멀리 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징계를 사람을 망하게 하거나 멸망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종말서신이라고 하는 데살로니가후서3:14~15에서도 읽게 되는데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는 내용이다. 진리를 순종하는 우리의 교회가 사랑과 공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죄를 징계하고 선한 것은 칭송하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
Ⅲ. 죄가 그리스도의 몸에 퍼져서는 안된다.(6~8)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과 함께 가지고 은사를 풍성히 가졌다는 교회가 죄를 묵인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없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이렇게 어리석은 것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누룩은 적은 것이지만 결국 그 효모를 온 덩어리에 퍼뜨리는 것처럼 검은 곰팡이와 같은 해로운 죄의 효소도 온 교회에 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사를 가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과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분명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닌 것은 아무리 철학적이고 그럴싸한 것일지라도 모두 거절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매 주님의 날마다도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무교병을 떼게 하신 것도 역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하였는데 여기에 묵은 누룩은 과거의 세상에서의 죄의 습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5:9) 누룩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 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히 버렸어야 할 과거의 묵은 누룩을 아직도 버리지 못함으로 새 덩어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는 말씀이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유월절 양 즉, 무교절에 먹히기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8)
여기 ‘명절을 지키되’는 과거 이스라엘이 무교병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켰던 것처럼 이제는 새 언약의 명절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되 과거의 죄의 삶에서의 습성도 말고, 죄악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면서도 무감각한 악의적인 것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진실함으로 그리스도를 기념하자는 것이다.
이제 새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이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과거의 죄의 습성을 물속에 장사 지내고 전혀 새로운 각오와 고백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런 새로운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에 다시 괴악한 과거의 죄의 누룩이 퍼지는 것을 절대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이런 입장에서 순전한 누룩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묵은 누룩을 철저히 걸러내고 잘라내는 …
세상에서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둠의 관습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앞에 가지고 기다려서는 안될 것이다.
어둠의 세력은 반드시 교회에서 쫓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육신의 방법으로는 안되고 영의 방법으로 행해져서 죄에 대한 수치를 느끼고 회계하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앞에 구원의 모습으로 서게 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묵은 누룩이 교회에 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순전한 누룩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의 의로 삼고 유월절양으로 십자가에 희생되신 주님을 기념하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사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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