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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결혼의 이유를 나누었다면 여기서는 결혼을 지켜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면서 특히 결혼생활을 지켜가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더욱 힘써야 할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불신의 반쪽과의 관계에 있어서 오히려 신앙의 편이 희생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대 일의 관계가 깨어지거나 확대될 수 없음을 권면하고 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 육신적으로는 손해보고 희생해야 한다는 권면을 성경은 많이 주고 있는데, 오늘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기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십자가에 희생하신 주님께 영광보다는 욕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주님의 명령과 바울의 당부의 부분을 보게 되는 데, 결혼한 관계 속에서 이혼이 불가능하고 만약에 이혼이 성립되었을 경우에는 홀로 살던지 이혼했던 당사자와 다시 합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불신의 아내든 남편이든 비록 믿음생활을 하지 않을 찌라도 살고자 한다면 버리지 말라고 하는 권면은 바울 자신의 당부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의 궁극적인 바램은 그렇게 살다가 마침내 불신의 아내이든 남편이든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지 않겠느냐는 기대이고 그렇게 될 때 자녀들까지 깨끗한 삶을 전달받을 수 있음을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신앙하는 것으로 인해서 갈라서야 하겠다는 불신의 편의 요구에 응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신 주님의 화평의 복음 속에서 이런 것에 너무 얽매여 불행해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불신의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하려는 의지로서 삶을 지속하되 오직 주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부부의 관계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고 때로는 불신의 반쪽을 가졌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할 때가 많다.
그럴 찌라도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부르신 주님의 사랑의 의도에 부끄러움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반쪽의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이미 서로가 같은 믿음으로 산다면 그것부터 감사하고 그렇지 못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격려하는 …
Ⅰ. 결혼에는 일반적인 인간관계 이상의 의무가 따른다.(10~11)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첫 번째의 당부는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씀으로 어찌 보면 반 강제적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당에 계실 때 율법으로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분명히 못을 박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4~6)
결혼을 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완벽한 하나님의 질서에 순복 해야 하고 단단히 붙여진 것이 나눠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고 찢어진 흔적이 평생을 남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1.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귀중한 관계이다.(10f)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는 관계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①부모-자식(자연적); ②부부(맺어지기까지 는 자율적), 그만큼 지켜져야 하는 관계인만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남녀가 만나는 결혼이다.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명령이 분명하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2. 갈라서지 말라!(10b) 사람들의 생각은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첫 결혼식에서의 서약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여기에 특히 결혼에 더 수동적인 ‘여자’가 먼저 거론이 되고 ‘아내’가 아닌 ‘여자’와 ‘남편’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또 쓰여진 용어의 본래적인 표현상 ‘갈라서지 말고’ ‘버리지 말라’는 표현이 모두 수동적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혼은 절대로 적극적이지 말아야 할 것을 심심 당부하고 있는 표현을 본다.
3.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관계가 지켜져야 한다.(11)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6) 이것이 깨어지면서 상처와 많은 어려움이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적어도 결혼에는 사람의 윤리나 도덕 이상의 계명이 함께 하는 것은 이 약속과 모형이 창조주로부터 왔기 때문이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사탄이 뱀을 통해서 이간질 시킨 아담과 하와의 혼인적 회복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
Ⅱ. 믿지 않는 반쪽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라!(12~15)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두 번째의 당부는 이미 결혼한 부부 중 한쪽만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경우에는 두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인 경우와는 또 다르다. 일세기 당시의 고린도는 불신의 사람들은 사실 깨끗지 못한 부부생활을 가정하고 이러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1.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버리지 말라!(12~13)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13) 여기서도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먼저 거론되고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나중 거론 되는 것이 일반적인 남녀의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 다르다.
왜냐하면 혼인에 있어 남자가 주체가 되고 여자는 돕는 배필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0)
여기에서 비록 수동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선택의 권리를 불신의 편에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이 독특하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사람을 향하여 “버리지 말며, 버리지 말라!”는 표현의 반복이다.
2. 불신의 반쪽에 믿음의 좋은 영향을 받게 하라!(14) 그러면서도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라는 기대를 주고 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불신의 영향을 넘어서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이 그것이다.
그러나 “믿지 아니 하는…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거룩하게 되나니” 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고 어둠의 상대보다도 경건의 능력을 지켜 갈 때만 가능함을 알아야 하므로 뼈를 깎는 희생이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거룩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나니”는 완료형이 아니고 미래 가정형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양친이 다 성결한 결혼 생활을 갖지 못하면 그것은 안타깝게도 다음 세대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을 경고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거룩한 영향보다는 분명히 불신의 영향을 더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3. 불신의 의견을 존중해줘라!(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갈리는 것은, 나눠짐의 의사는 오히려 불신의 의사를 들어 줄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화평 중에서 부르셨느니라!” 즉, 그런 결과로 절대로 불화해서는 안될 것을 당부하는 의미이면서 그것에 얽매여 삶을 망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을 지나치게 해석해서 ‘화평을 위해서 이혼을 해주라’는 내용은 아니다.
이혼은 불신과의 관계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들어 주겠지만 그럼에도 요즘처럼 원수처럼 여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핵심은 불신의 반쪽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쳐서 믿음으로 돌이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나누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도 역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Ⅲ. 믿음의 사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16~17)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의 반쪽을 위하여 희생하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해서 개종을 시키겠다는 시도는 사실 무모한 일이다. 거기에 대한 확률은 매우 낮고 부정적인 확률에 이를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이 역사 속에서도 검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서 “불신 배우자와 결혼을 피하는 것은 전도의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있다고 하는데, 전체적인 내용 자체가 ‘이미 결혼한 가운데 한편만이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충고’[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v12~13] 라는 데서 주어진 내용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1. 부정적인 결론을 먼저 가지지 말아라!(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둘 중 하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기회는 있을 수 있다. ‘우리 남편은 안되! 우리 아내는 안되’ 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먼저 가져 버림으로써 대하는 태도에도 적극적이지 못할 수 있다.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이 말씀은 오늘도 한쪽만 신앙하는 분들이 꼭 품고 살아야 할 기대의 기도 제목이다.
2.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대로 행하라!(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말아라!
이 당부는 뒤에 연결되고 있지만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삶은 모든 범위에서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할례자로, 종으로v18~21)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사명이 신앙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 됐든 각자에게 다르고, 다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각자의 형편에서 평화와 복음 증거를 위하여 적절하게 사용 되어져야 하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과 삶의 역할을 귀중히 여기고 주님의 기대와 뜻을 세워가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이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당부한다. 즉 이러한 삶의 자세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는 당부가 아니라 역사 속의 모든 교회에서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주는 권면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에덴에서 허물어진 가정의 회복을 위한 희생이기도 하다. 요즘 ‘집은 있으되 가정은 없다’라는 안타까운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불신의 말이다.
적어도 결혼은 어떤 관계보다도 중요한 관계로 ‘이 비밀이 크도다’(엡5:32) 라고 증거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한쪽이 불신일 찌라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엡5:22~33)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신의 반쪽이 믿는 반쪽에 의해서 거룩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우리는 안타까움 속에서도 거룩해 질 것을 바라며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약 불신의 반쪽이 나눠짐을 요구하더라도 그것 조차도 의연히 받아들이는 성별 된 모습으로 기다릴 수 있는 성결을 통해서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기대를 주고 있다..
믿는 것은 세상에서 어쩌면 더 손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라고 미리 부정적인 생각으로 절망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든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39)는 확신을 가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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