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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혼인관계를 논하던 바울은 이 말씀의 중심에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서도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을 당부하는 말씀으로 앞뒤를 연결 시키고 있는 내용을 오늘 읽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상황은 모두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봐도 그렇고 기타의 주님께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도 부르심에 응답할 때는 형편과 처지가 다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때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을 때였다. 갈릴리의 어부출신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세리 마태도 세관장 삭개오도 심지어 신약성경의 가장 많은 저자로 쓰임 받은 바울도 비록 어리석긴 했지만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역시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OT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주님을 만날 때의 삶과 그 후의 삶이 바뀐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일 자체가 바뀌어서 그렇겠지만 일세기에 주인의 신분보다 노예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노예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상전인 주인과 구세주이신 주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한결 같은 소원은 ‘이 노예의 삶에서 자유 할 수 있다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텐데 …’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형태는 바뀌었지만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일만 아니면 정말 남의 눈치보지 않고 주님을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을 텐데 …’ 라고 한숨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어쩌면 형편과 처지가 신앙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주님께 하소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세기의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면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고 격려하신다.
그보다 더 다른 차이는 유대인 즉,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無할례자인 이방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도 차별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할례자들은 무할례자들을 비웃고 무할례자는 할례자인 유대인들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자들을 당연히 부러워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평가에도 주님은 할례를 받고 그렇지 못한 것도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신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2~3장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다르지 않은 죄인이라고 선언한 바 있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로 할 뿐임을 증거한 바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보다도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귀함을 알아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앞서서 생명의 주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할 이유요 기뻐할 이유라는 것이다. 다만 부르심을 받은 가운데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인간적으로는 신앙하는 것이 어려운 입장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이유로 이와 같은 감사를 찾을 수 있는 …
Ⅰ. 육신적인 겉치레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17~19)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지난 주 마지막 시간에도 다룬바 있지만 오늘의 말씀에도 그대로 연결되는 중요한 말씀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 우리의 생각은 지금보다 변화된 환경으로 바꿔 주시면 감사하겠는데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하고 계심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17b) 하신 것이다.
사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유대인들의 자긍심은 대단한 것이었고, 모든 선교지에서 유대인들의 편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큰 대적자로 자처했던 사람들도 역시 이 할례를 받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이 말은 신앙에 있어서 조상 대대로 내려왔던지, 아니면 지금 새로 시작을 하던 그것이 차이가 될 수 없으므로 이런 것으로 차이를 둘 것이 없음을 증거하면서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8)고 당부하고 있다. 결국 신앙에 있어서 누가 더 유리하고 불리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19) 육신의 모양이나 흔적이 중요하지 않음을 증거하는 것이다.[갈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19b)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육신의 모양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계명을 지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계명 (헬, 엔톨레, entole, 명령, 즉 권위 있는 규정, 계명, 계율)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형편과 처지를 따라 복음에 순종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생활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4)
육신의 겉모양을 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랑의 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 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Ⅱ. 현실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 필요하다.(20~21)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처지가 다 다르다고 앞에서 전제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이 처지와 형편까지도 이기고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형편과 처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렵고 힘드는 형편을 확 변화시켜 주시면서 믿음생활을 하도록 하면 얼마나 좋을 것 같은데,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을 나왔어도 광야가 버티고 있고 요단을 건넜어도 여전히 가나안 7족속이 저들을 대항하고 나왔고, 일세기의 노예들에게는 여전히 노예로 살도록 노예 가운데서 부르시면서 조금도 다른 변화를 주시지 않은 것이 저들의 힘겨움이었다.
이 말씀이 오늘 마지막 절과 첫 부분이 비슷하고 결론이 중요하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꼭 같은 표현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이다.
여기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 “부르심 받음”이다.(대략 9회) 사실 교회라는 말이 “밖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다. 창조주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보다 중하고 귀한 것은 없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것은 다 모자라고 실수하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한가지 잘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아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21)고 육신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힘겨운 당부를 주신다. [염려, 헬, 멜로, melo,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낱말이다 (마22:16“…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21b) 이것은 어쩌면 사람의 입장과 형편을 따른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어도 거기에 불만 갖지 말고 주님을 섬기고 그러는 가운데 만의 하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것 때문에 거절하지 말고 자유를 사용하라는 현실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본래의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것을’(헬, 말론, mallon)라는 의미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뒤집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인 노예 신분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라’는 의미보다는 ‘자랑스럽게’, 또는 ‘자신 있게’ 등의 의미로 종의 직분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을 뜻한다.
연결된 ‘사용하라’(헬, 크라오마이, chraomai)는 단어도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노예 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를 하는 데서 ‘주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종 된 현실 신분의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권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비록 신분이 종이긴 하지만 주 안에서 자유인이기 때문에 자유인으로 살고, 최종적으로 주님의 종 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표현을 하 곳 보면 9:12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로 종에서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자유를 주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여기의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21b)는 당부는 지극히 인간적으로 들린다.
그리스도인은 신분과 처지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장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낮은 처지일지라도 그 신분 조차도 신앙에 더욱 매진하는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Ⅲ.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2~24)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앞에서 가르친 내용들은 여기서 결론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즉, 믿음을 가진 자들은 비록 노예의 상태에서 주님께 왔더라도 이미 죄의 저주의 값을 주님께서 치러주셨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종일지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고 비록 자유인일지라도 주님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할 종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22) 그러므로 모든 인류를 평등케 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가지 못할 데가 없는 자유인일 지라도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하여 자제하고 스스로를 주님께 묶어 제한하는 스스로 종 됨은 하나님께나 같은 믿음을 가진 당시의 종들에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 이미 바울 사도는 6:20에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였고 이러한 하나님께서 지불한 대가의 중요성을 베드로 사도가 분명히 하고 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이제 최종적인 삶의 승리와 희생의 이유를 선포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여기서도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가 반복되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방법을 일러 준다.
노예 신분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종의 삶을 계속 유지하라는 희생을 주문하기 보다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노예의 신분을 보다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의 승리의 비결은 상황의 변화 보다는 같은 운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상황을 이기는 권능이 함께 함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육신의 겉치레의 모양을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실제적인 힘이요 자랑이 되어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현실이 어떠하든지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 주님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과 불신의 사람들과의 차이이다.
종의 신분이든지 자유인의 신분이든지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이기게 하시고 극복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과 임마누엘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어려운 환경이 변화가 전혀 없어도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 광야는 초장이 되고 불 가마는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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