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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녀의 귀중한 교훈을 주는 가운데 지난 시간에는 육신의 겉치레의 모양을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실제적인 힘이요 자랑이 되어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종의 신분이든지 자유인의 신분이든지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이기게 하시고 극복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나눴다.
오늘은 다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마지막을 염두 해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이 남녀, 혼인의 관계서도 어쩔 수 없는 과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육신의 안정적인 삶의 추구가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영적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육신의 고난이 된다는 사실과 함께 너무 세상의 편리나 안전에 의지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는 강압적인 계율 보다는 자신의 영적인 권면이면서 주님의 권면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25) 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 남녀의 관계의 마지막 절인 40절 말미에서도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영적인 당부임을 말하고 있다.
일세기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도 지금의 경제성이나 형편과 처지에 덧붙여서 영적인 상황과 문제까지도 더 고심하고 헤아려야 하는 입장이었던 같다.
종교 탄압을 황제의 칙령으로 선포하기 전의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속에서 불신의 로마 관리들의 보고를 보면 정신적으로 무장한 로마의 관리들이 감동을 받은 사실들이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산 사람들의 기록들을 보게 된다.
이중에서도 2 세기 초 로마제국의 비두니아와 본도(Pontus and Bithynia) 지방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 A.D.112)가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트라얀(Trajan)에게 보고한 내용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람이 황제에게 보낸 보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받은 감동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로마 정부 관료간의 극비 문서로 총독이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박해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에 거역하거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기까지 한 삶이었다고 칭송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오늘도 인간의 중대사인 혼인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주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고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Ⅰ. 늘 마지막을 염두 해 두라!(25~26)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이스라엘도 그렇지만 당시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 여성의 권한은 그 아버지에게 있었다. 이런 것들이 율법에 보면 처녀의 하나님께 서약하겠다는 결심에 그대로 나타난다.(민30:3~5)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않는 진실함을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25f)
바울 사도는 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어느 문제에서나 이렇게 진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①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은혜) ② 충성스러운 자가 되어(믿음), ③내가 의견을 말하노니,(이해와 적용)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의 자세는 사실 이래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6) 일세기 이후 바울의 때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이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중지하도록 한 AD 313까지 박해는 쉬지 않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왔던 것이 역사 속에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박해 중에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사랑하는 대상이 볼모로 악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홀로 사는 것이 믿음 생활을 지속하는데 더 어려움이 적을 것이라는 신앙적인 당부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으로 인해 당시에 당하는 불이익이나 어려움을 줄이기 위한 바울 사도의 그야말로 사랑 어린 충고라는 사실에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b)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이렇게 아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된 형제사랑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어야 할 신앙적 덕목이다. 롬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삶의 어떤 중대한 과제를 결정할 때 신앙의 사람들은 어떤 극단 적인 부분까지 생각해서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겨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에 대한 경계로 특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청춘의 여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모든 결정에 재림이 목표가 되고 중심이 된다면 오늘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Ⅱ. 세상에서 육적 조화를 위하는 일이 육신의 고난이 된다.(27~28)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분명히 남녀가 각각 혼자 보다는 부부로 온전한 하나를 이루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문제가 없는 한, 세상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육체적인 욕구에서 죄를 짓는 일뿐만 아니라 유리한 점이 많을 것이지만, 환란과 박해 속에서는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확신으로 맡기지 않는다면 혼자보다는 불리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 상태에서 환란이 온다고 대상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윤리적으로도 옳지 못한 것이다. 서로가 결혼서약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책임지는 의무도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조건이다.
“매였느냐, 놓였느냐!”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둘 다 상대에 의한 상태로 즉,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권면과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앞에서 당부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17, 20, 24)는 당부와도 어울리고 거룩한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한 결혼의 관계에도 조화를 이루는 권면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
이런 어려움과 결혼으로 인해 있을 수 있는 어려움은 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창조의 질서를 이루는 것이 분명 男女의 性에 관계없이 ‘죄짓는 것은 아니요,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라고 확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권면을 하고 있는 이유 역시 자신은 결혼을 못했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을 시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안타깝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육신의 편리와 조화를 위하는 일들이 때로는 육신의 고난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이 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은 그냥 동물처럼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도 진리를 충족시키는 삶을 살려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려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데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는 이유에서 이런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Ⅲ.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은 지나가는 것이다.(29~31)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사라질 것을 우리를 위해 영원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위하여 드리고 쓰고 영원을 보장 받는 것이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때[헬, 카이로스(kairos), 기회, 정해진, 적당한 때, 시기]가 단축하여진 고로’는 개인적인 마지막과 주님의 재림을 앞둔 박해의 때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고 겁주기 위해서 주님의 재림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을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언제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한결 같이 당부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지불하고 산 성도들은 이 세상의 결혼이나 보화와 재물들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것들로 인하여 다시 오시는 주님께 신실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고 경계하는 표현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 되었다면 이 세속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7:16) 라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속에도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것을 가진 것으로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OT에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그의 백성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이런 이유에서 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과 반대되는 자세를 말씀하고 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30~31)
①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믿음으로 오는 고통은 장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씻어 주실 것이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7:17)
②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③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팔아서 가치가 나가는 세상의 보화가 많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기대거나 의지하는 것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거쳐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합당치 못한 것이다.
④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있어도 없는 체 하는 이중적인 것을 주문하는 바울이 아니다. 언제든지 부르시면 두고 갈 자세로 세상의 것이 자신을 절망에서 구원해 주리라는 잘못된 의지를 버리라는 당부이다.
왜 그래야 하는 가를 계속 밝히고 있다. “이 세상의 외형(현재적으로는 분명한 것 같지만 종말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특성)은 지나감(멀리가다, 떠나다, 통과하다, 없어지다, 소멸되다)이니라”
결국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며 무상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그 형상조차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15)
결국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두다가 그것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얼마나 큰 절망을 경험하는가!
그러나 지금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 주신 모든 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것들이다.
결혼을 비롯한 중대사에 언제나 자신이나 이 세대의 마지막 때를 염두 해 두고 행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육신을 위하여 허락된 것들은 오히려 영적인 입장에서 육신에 고난을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과 기대를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들에 자유 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튼튼히 가지므로 이런 모든 것에 혼란치 않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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