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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결혼의 삶과 관련하여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상대가 영적이지 못할 때 많은 갈등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결국 서로 다른 둘을 완벽하게 기쁘게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혼자 살 때는 오로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또 다른 대상인 상대에게 있어서 신앙하는 것이 마치 상대의 사랑에 있어서 대결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랑까지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은 파국으로 갈 수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다면 그 영적인 사랑의 힘이 서로의 관계도 든든히 지켜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다.(그리스도께 충실치 못한 자는 국가에도 충성치 못한다.-Constantine)
때문에 비록 신앙이 얕은 남편이든 아내일지라도 주님께 드리는 헌신조차 욕심 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손해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이러한 부부간의 관계에서조차 혼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의도에서 당부를 하는 것이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을 올무로 불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사랑의 호소를 고린도 교우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다음 8장과 10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혼란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믿음의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속 거론되는 것도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는 말처럼 우리의 의지가 믿음 생활하는데 혼란이 되어서는 안되고 육신의 평생 동안 서로에게 매이는 혼인의 관계 조차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어려움이 아니라 복이 되게 해야 한다는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Ⅰ.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32~34)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여기에서 대칭되는 두 가지는 ‘장가 가지 않은 자’와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모두 ‘주의 일을 염려하여’ 먹고 마시며 행동하고 애쓰는 모습으로 삶을 사는 것이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라거나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라는 모습일 것이라는 바울의 생각이지만 이것은 결코 결혼하지 않은 사람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거나 몸과 영을 거룩하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대칭은 ‘장가 간 자’와 ‘시집 간 자’는 둘 다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또는 ‘남편을 기쁘게 할까’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 중간의 표현은 ‘마음이 갈라지며’이다. 사랑하고 헌신하는 마음이 나누어 진다는 표현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마음이 일관되지 못하고 흩어지고 나눠지는 것으로 경계 되어지는 표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창조의 질서 속에서 남녀를 하나로 만드시고 이것을 에베소서5:22~33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속에서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결혼한 사람은 신앙을 더 잘하고 혼인한 부부는 영적인 섬김에 불경해 질 것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형벌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감당해 주신 사랑과 희생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헌신하는 이유인데 결혼을 하건 혼자이건 이러한 믿음이 반쪽을 찾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나눠져서도 안 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결혼하지 않아서 성적인 호기심으로 죄를 지을 수도 있고(v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안정된 부부로 주님을 더 잘 섬기는 예는 사회에서나 성경에서나 얼마든지 모범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부부들은 서로에게 신앙에 있어서의 방해자가 아니라 서로 기도할 틈을 양보하는 경건함과 서로를 위해 기도로도 협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이만 된다면 분명히 혼인한 것이 신앙에도 더 적극적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하는가는 참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특히 신앙의 사람이라면 부부가 합력하여 주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이 결혼 생활도 더 완만하고 행복하게 하는 바탕이지만, 언제나 나누고 선택하라는 타협은 육신적일 때 틈타게 되는 어두움이다.
“기쁘시게[헬, 아레스코(aresko), ]할까, 기쁘게 할까”라는 표현을 주님을 향한 것으로 찾아보면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살전2:4, 15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이든 결혼하여 부부가 된 가정이건 믿음의 사람들의 행복점은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애쓸 때 부부 관계도 행복하고 영육의 조화를 갖게 되는 것은 이것이 첫 단추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Ⅱ. 사도와 아버지의 신앙적 영향력의 한계에 대하여.(35~38)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35절을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좀더 쉽게 이해하도록 번역하고 있다.
이제 것 권하던 바울 사도의 깊은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현이 여기에 기록되고 있다. 결혼을 한 사람이건 하지 않은 사람이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혼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바울이 이러한 가르침을 주는 것은 기혼이든 미혼이든 삶 속에서 모범된 삶을 당부하면서 결혼이 헌신에 장애가 되지 않고 믿음생활에 어려움이 아니라 더욱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서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확인하게 된다.
36절의 표준 새번역은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혼기를 놓칠 때까지 붙들어 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 결혼을 시키십시오. 그것은 아버지에게 죄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사실 [혼인시기]라는 기준 자체가 없어졌다. 그러나 창조의 질서 속에서 혼인은 20대에 하는 것이 건강한 아기를 가질 수 있고 건강한 어머니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의학적인 보고들을 더러 본다. 그러므로 적정한 시기에 결혼을 하는 것이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데 바탕이 된다고 하는 데서 그렇지 못한 즉, 기준이 없다는 요즘의 모습자체가 옳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36절의 내용은 당시의 딸의 혼인에 대한 결정권이 아버지에게 있었고, 이러한 결정을 해야 할 사람이 결혼할 당사자의 의사보다 자신의 신앙으로 적령기의 딸을 혼인을 미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데서 바울은 이런 당부를 하고 있다.
37절 역시 표준 새번역에서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서 자유로운 결정으로 자기 딸을 그대로 두기로 작정한다면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과 언약 속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약속 역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하나님과의 약속만 잘 지키면 된다.x]
이런 입장에서 결혼에 대한 혹 상대방과의 언약이 있었다면 역시 그것이 믿음 안에서 무리가 아닌 이상 그 혼인언약은 일방적으로 깨뜨리는 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그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혼을 시키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표현을 “부득이한 일도 없고” 라고 표현하고 있다.
36절에서는 결혼을 시키는 것에 대한 권면이었다면 여기에서는 그것에 반대되는 내용이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앞에서 결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신랑을, 신부를 기쁘게 할까’ 라는 혼란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에 있어서 짐짓 경건하지 못한 부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오히려 육신의 일을 염려하여 죄악을 공모하는 부부라면 차라리 혼자가 낳은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처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 귀해서 육신의 욕구도 접어두고 홀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인하여 혼인조차도 못하는 신앙인이라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상이 더 클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 부분에서 우리가 부모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에도 딸에 대하여 결혼의 문제 까지도 신앙으로 인하여 자제할 정도의 영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데까지 신앙적 지도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요즘 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안타까운 말이 있다. 그러나 부모의 영적인 영향력이 자녀의 결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영향력을 바울은 다음 절에서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개역)는 영향력을 가진 부모는 더욱 아름다운 부모이고 가정이라는 말씀이다.
오늘의 시대에 이런 데 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님의 가정들이 되시기를 …
Ⅲ.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삶이 되라!(39~40)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마지막으로 혼인의 문제에서 이미 앞에서 불신의 남편과 불신의 아내에 관한 문제를(12~16) 거론 한바 있지만 재혼에 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이 혼인의 문제는 사실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문제이다.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39)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상대와 다시 결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이 효력을 잃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면서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7:2~3)고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앞에서 처녀에 관한 당부와 같은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라고 재혼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역시 주어지는 조건 하나는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는 것인데 재혼을 하던 하지 않던 이미 그리스도의 지체됨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이다.
신앙생활 잘 하다가 남편이나 아내를 잃고 믿음마저 잃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 특히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에게는 나이가 들어도 혼인 이외의 남녀 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40) 사실 아내든 남편이든 두고 먼저 가는 사람은 남겨 두고 가는 반쪽에 대해서 더 이상 권한이 없다. “나 먼저 죽으면 재혼 할거야?” 그러나 또 다른 경험과 모험을 하기에는 남은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런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홀로 일생을 산 바울의 경험은 그것이 자신에게 최선이었다고 확신하고 있고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평안 속에 신앙을 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19:12) 그러므로 육신으로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이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의견을 내 놓으면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40b)고 권면하는데 이것은 자신은 독신으로 살 수 있는 은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뜻도 되겠지만 앞에서 말한 권면들이 직접적으로 주님께서 계명으로 주신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이런 가르침이 성령의 지도에 따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모든 신앙의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미혼이든 결혼한 부부의 관계에서이건 “어떻게 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라는 의로운 고민 속에 삶을 영위할 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혼란한 시대에서도 자녀들에게 신앙의 영향력이 인생의 중대사라고 하는 결혼에까지도 미칠 수 있는 데까지 가야 한다.
세상에서나 영원 속에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하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매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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