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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장의 혼인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라는 것으로 봐서 고린도 교회가 말이나 편지로 역시 이런 문제를 바울 사도에게 질문했던 것으로 이해가 된다. 당시 고린도는 물론이고 그레꼬로망 시대의 도시들에서 각 신들에게 동물 제사를 지내는 일은 흔한 일들이었고 이 제물들은 사제들의 차지가 되긴 했지만 이런 고기들은 지금처럼 냉동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고기들은 시장에서 흔하게 거래가 되었었다고 한다.
물론 시장에는 이렇게 제물로 사용되지 않은 고기들도 있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럼에도 바울 사도께 질문 하는 내용은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한 것을 먹을 것인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논란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 이 8장과 10장에서 이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지만 중간에 9장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문제에 바울의 답변이 과연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드러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상반된 두 개의 논의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주장으로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의결한 부분의 하나라고 하는 데서[행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강하게 부정을 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 ‘도살장에서 잡은 고기나 우상의 제물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고 하여 아무 것을 먹던 문무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 대립이 있었고 결국 이 문제 역시 바울에게까지 질문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은 서로가 여기에 대해서 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교만과 분파심에서 문제가 커진 것을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께서 주는 교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1f),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2)”
이 먹는 문제로 신앙하는 형제를 실족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경계는 [로마서14장]과 함께 바울 사도께서 대단히 안타까워했던 부분인 것 같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서도 이런 일로 인한 분쟁이 있을 수 있다는 데서 이 교훈을 통해서 이런 혼란을 빠져 나오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Ⅰ. 여기에서도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모든 부분에 지식이 있는 줄 알지만 신앙에는 사실 안다고 하는 지식이나 자리 보다는 믿음으로 인한 사랑과 순종이 더 중요하다. 신앙에 있어서 앎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망치게 된다.
여기 첫 부분에서부터 분명한 구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지식과 사랑이다. 먼저 안다고 하는 지식을 보면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1m)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2) 바울은 사랑과 지식을 비교하면서 먼저 우리 지식의 온전치 못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실 지식으로 채워진 것을 기뻐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15:14)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재로 영적인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바울의 표현대로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영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지식이 없으면서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주시는 경계가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벧후1:5b~6f) 더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이 신앙에 필요하지만 이 지식을 덕스러움과 조절할 수 있는 절제가 앞뒤에서 함께 가지 않으면 믿음에 문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깨달음은 개인의 생각 속에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데서 깨달아져야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것 하나를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곧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당연히 따라 오는 말씀이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2) 라는 경계이다. 갈라디아서 6:3에서도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바울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딤전6:3~4) 라는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뒤에서 다시 거론하게 되겠지만 결국 고리도 교회의 문제는 사랑이 없는 지식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었다(9-13). 나타난 우상숭배의 문제는 사실에 있어서 그들의 가졌다는 지식으로 교만하게 되고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성숙한 신앙적 인격과 사랑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해결점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과는 반대로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b) 라고 했고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3)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건처럼 들리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삶 속에 드러나게 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은 증거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배움으로 머리 속에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재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결국 사랑 없이 겉으로만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아무리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우상의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문제의 다툼도 드러난 우상의 제물의 문제보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분쟁의 여지를 가진 양편의 지식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사랑을 잃어버린 내면의 문제가 더 큰 것이었다. 언제나 교회의 문제는 이렇게 발생한다.
Ⅱ. 이 세상에는 신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이 많이 있다.(4~5)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바울 사도는 문제의 원인을 지적한 다음에는 우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규정하면서 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간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하는 우상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으로 인격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위하고 제사하는 대상을 조금만 바로 안다면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그런 대상들을 최고의 것들로 받들려고 하는 일들을 돌이키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나중 10:20에서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라고 부연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숭배는 사실 그 허상의 이름을 빌어서 귀신 즉, 마귀 사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도둑질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의도로 우상을 섬기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중 10:21에도 역시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 당부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10:14) 결국 우상은 금을 입혔던 은을 입혔던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 뿐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5,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8~9”(렘10:)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5) 당시의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많은 종류의 하늘과 땅의 신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섬겼다. 특히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했는데 결국 로마의 황제도 신으로 숭배 되었고 그를 [주, 헬, 퀴리오스(kyrios)] 라고 불렀고 그들은 만날 때마다 나누는 인사가 ‘황제는 우리의 주’ 라고 인사를 하는 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십니다!” 라는 고백 때문에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비해 뒤에 연결되겠지만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b)는 선언은 이 역사 속에 계속 드려야 할 신앙적 고백이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고 어리석어 보인다.[오직 유일하신 분과 수를 가늠할 수 없는 이름 붙여진 신들] ‘되도록 많은 신들을 섬기다 보면 그 중에 한 신이라도, 또 그 많은 신들이 다 돕는다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의 생각일 뿐으로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는 고백의 이유이고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이어지는 6절에서 더욱 분명히 증거 하고 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 섬기는 모든 신들은 참으로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에서도 대단히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Ⅲ.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 뿐이다.(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드디어 우리가 두려워하고 섬겨야 될 분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고 증거한다. 역사 속에 자신을 계시하시며 예언을 통해서 분명히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1.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심을 증거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이러한 고백은 로마서11:36의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고백과 꼭 같다.
이러한 고백은 앞에서 말한 거짓된 신이라 이름 붙인 헛된 것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요 우리 인간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옳은 것이다.
2.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녀 된 성도 서로간의 사랑의 관계와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고후1:3)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피로 사주셨고(행20:28) 즉, 자신의 생명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놀랍게 변화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이제는 그를 위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끌어 낸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언하시기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셨고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된 백성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함을 증거하신다.
바울은 이러한 신비를 찬양하고 노래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러한 고백은 우상과 반대되는 창조주에 대한 칭찬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머리로는 판단할 수 없는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언제나 신앙에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 안다고 하는 지식의 문제로 사람에게 문제를 만들 뿐만 아니라 주님을 향하여 까지 교만해 질 수 있는 것이 문제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사는 어디에든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신이라 이름 붙여진 우상들이 있고 이것은 주님께서 경계하신 하늘과 땅과 물속에 있는 각종의 형상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곳의 우상이든지 바닷가의 우상이든지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수공 물임을 알아야 한다.
오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범죄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기 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인격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야 말로 우리 생명의 출발이고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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