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고전 9:1~10 2010-07-18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병폐나 남녀의 관계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등등에 대한 답변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여 증거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바울을 따르지 않는 당파심을 가진 사람들의 사도권에 대한 반대를 듣게 되고, 여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 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우상의 제물 문제를 풀어 증거하는 중간에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 사도는 나중에 부활을 증거하면서 오늘 내용하고는 조금은 다른 내용을 증거하는 내용도 같은 이 고린도 전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당시에도 영지주의나 건전치 못한 거짓 일꾼들 때문에 사도와 신앙의 정통성에 대한 중요성이 더러 거론되기는 한 것 같다. 차제에 사도에 대한 자격을 먼저 살피고 이 말씀을 나누었으면 한다.

용어상으로는 [사도, 헬, 아포스톨로스(apostolos), (apo- ~부터 + stello-정리하다, 준비하다, 조심하다, 떠나다)사절, 특히 복음의 사신, 직위상 그리스도의 전권대사, (기적적인 권세를 가진)사도, 사자, 보냄 받은 자]

우리가 성경 속에서 사도에 속한 사람들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1:21~22f)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이 인용한 내용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12사도에 가입시킬 자격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좀더 성경에서 아포스톨로스가 쓰여진 대상을 보면 먼저 사도행전 속에서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행14:14, 4) 라고 바울 뿐만 아니라 바나바 조차도 사도로 불려지고 있다.

고린도후서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케뤽스, keryks)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갈라디아서1:1에서는 바울이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과거 속에서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교회를 박해한 사실로 인해서 주님께 죄스러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고린도 교회는 자신이 친히 세우고 1년6개월(행18:11)을 말씀을 전하여 교회를 키웠다. 그런 교회가 분파와 신앙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린도 교회를 위했던 역할이 결코 인간적인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을 이 9장에서 읽게 된다.

신앙 속에서 인간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고 진정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더불어 이루어 지는 일들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사람의 가치나 기준에서 혹평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님을 오늘의 시대에도 알아야 하고 특히 고린도 교회처럼 이런 잘못됨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닌 세속적인 행동이라고 하는 데서 조심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비록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기는 하지만 말씀과 물과 성령으로 더불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결로 세상과 구별된 하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교제하므로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두가 되기를…

사실 말씀을 순서대로 전하다가 제 자신을 위하는 것 같은 말씀을 전하게 될 때가 가장 난감하기도 하지만(건너뛸까!) 이것도 역시 말씀에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제 자신을 위한 변명으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들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



Ⅰ. 바울의 사도됨을 증명할 고린도 교회(1~3)

바울은 시작에서부터 부정적으로 ‘아니냐, 보지 못하였느냐, 아니냐,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사도권의 변호를 시작한다.

바울 사도는 인간 관계의 굴레에서는 물론이고 구약의 율법이나 바리새 주의에서 세상적인 규범에서와 로마의 정치권에서도 얽매이지 않는 완벽한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나 자유를 그리스도를 섬기고 십자가를 증거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면서까지도 쓰지 않았음을 더러 더러 말하고 있는 사실들을 같은 이 9장에서 밝히고 있다.

v12(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 v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v18(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자유를 가졌다면 당연히 이래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사도됨의 첫째 근거를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첫 대면한 것이 바로 다메섹이었고 다시 아라비아로 가서 주님과 자신의 섬김을 깊이 의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갈1:17)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도들보다도 주님의 희생을 기념할 것에 대한 당부도 보다 철저히 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3~25)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 말이야 말로 바울이 자신의 [사도]임을 주장할 수 있는 두 번째 근거이면서 가장 호소력이 있고 분명한 증거이다. 사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면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임이 의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도가 아니라고 몰아붙이는 고린도의 일부의 교우들이 바울이 거절된다면 그들 자신들도 하나님의 백성 됨을 의심케 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처럼(마7:16, 20) 고린도 교회의 신앙적 열매인 교우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2)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위한 헌신을 통한 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회가 분명하고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은 근본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헬, 아폴로기아(apologia)]이 이것이니”(3)‘변호하다, 답변하다’의 뜻으로서 바울은 마치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이방인들이었던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시킨 분명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서 증인이나 변호인이 변증하듯 거리낌없이 답변하겠다는 의지다.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 고린도 교우들이 열매로 분명히 나타난 것처럼 영적인 열매가 분명함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을 대항하는 것은 그 대항자 자신들에게 손해이고 또 대항을 받는 하나님의 종도 소신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 서로에게나 하나님께 손해가 됨을 깨닫고 여기에서도 은혜로운 판단과 섬김이 되시기를…



Ⅱ. 가장 일반적인 사회적 예들.(4~7)

이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일한 자는 일한 대가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반적인 논리를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그 당연한 권리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일한 자신의 성실을 증거한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를 거쳐서 고린도에 왔고 다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돈벌이가 같은 데서 함께 일하게 되고 다시 실라와 디모데가 와서 함께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다른 사도들처럼 일한 대가에 맞는 먹고 사는 문제거리도 교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권한은 당연히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4)고 역시 의미를 강하게 강조하여 부정문을 사용하여 질문한다.

다음 주 말씀의 시작에서 보겠지만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1)고 다시 묻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5) 고린도 교회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베드로를 예로 들어서 아내가 딸렸으면 당연히 자녀가 있을 것이므로 가족까지도 부양 받을 권리마저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6)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들[예수께서 구속역사(救贖役事)를 이루시기 전에는 믿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역시 거론이 되는 것 같다.]은 물론이고 어찌 보면 사도의 정통성을 조금은 의심받는 바나바와 자신을 함께 복음을 위해 영적인 일을 하면서 육신의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한이 있음을 증언한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 이제는 가장 분명한 예를 들어서 증거한다. 자기 돈을 쓰면서 국가의 안녕을 위해 군생활을 하는 예(방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곡식이나 과실을 누리는 것이 당연함을 두 번째로 그리고 양을 키우면 젖을 먹는 것은 바로 키우는 이유임을 들어서 증거한다.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이것은 사실 율법에 보장된 권리이고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신20:6) 이스라엘의 지혜의 글들에서도 가르치는 교훈이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잠27:18)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활이 되지 않으면 영적인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분야의 영적인 일이든지, 누구든지 주님의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분명 모두에게 유익이다.



Ⅲ. 율법도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주어졌다.(8~10)

바울 사도는 일반적인 사회적인 규례보다도 더 호소력이 있는 구약 율법의 가르침을 들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8) 언제나 신앙적인 결론은 사람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감정과 세상적 관례나 속담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말씀에서 가르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되지 못한다.

일차적인 농경사회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교훈을 예로 들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 하였으니 …”(9f)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든 나라들이나 문화에서는 대부분 밭을 갈거나 곡식을 타작하는 짐승의 입에 그물을 씌워서 주변의 곡식을 상하게 하거나 타작하는 곡식을 못 먹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율법에다가 이 사실을 분명히 명시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25:4) 그리고 같은 당부를 목회서신이라고 하는 디모데전서에 오늘 본문의 내용과 같은 의미로 인용하고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

이 말씀은 물론 사람만을 위한다는 내용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천대를 당하는 가마귀 새끼 까지도 먹이를 마련해 주시는 분이시다.[욥38:41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시147:9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눅12:24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뿐만 이니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생명 없는 자연에도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생명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생각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요한 사도는 이러한 교훈에 거스르는 사람에 대해서 책망한 바 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요삼1:9~10)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9b~10f) 역시 이 기록도 오늘 우리를 위해 기록해 주신 말씀임에 분명하다.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10b)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교훈은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보다 깊은 뜻은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도 거두어 들일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농부들의 기대와 다르지 않음으로 응용하고 있다. 물론 너무 물질을 목적으로 하는 세속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역시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4)는 말씀으로 연결되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