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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1:1~16 2010-08-29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바울 사도는 우상과 그 제물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면서 이러한 모든 교훈들이 단순한 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마지막 당부를 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고린도 교우들에게 호소력을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말로 주지시킨다고 해도 잔소리로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교훈이 아니라 너무 자주 듣는 책망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 삶에는 아무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자신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3:9)

이미 4:16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부탁하며 호소한바 있고, 마지막으로 복음을 인하여 로마의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3:17)고 눈물의 호소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서는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라고 칭찬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당부와 부탁으로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2)

바울이 비록 떠나 있지만 고린도 교우들 중에는 바울 사도를 기억하면서 바울이 전한 교훈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서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당나귀에게 채찍과 당근 같기도 하다.

여태껏 주로 다룬 문제가 사회적이나 믿음에서 관계의 문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좀더 영적인 것으로 접근해서, 예배와 공적인 모임 속에서의 교훈들을 주고 있다. 이 11장에서는 당시의 유럽의 문화에서 예배에서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예배의 중심이 되는 주의 만찬에 관한 문제들에 교훈들을 주고 있고, 12~14장까지는 주로 은사와 공적인 모임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당시 고린도의 규범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오늘 말씀에서 다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남녀의 집회 속에서의 자세에 관한 것으로 신앙의 계명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어느 나라나 문화에 있어서 좋은 전통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도 사실이다.[대한민국의 孝思想 같은 것이다.]

상당히 긴 문장이지만 이 말씀의 요지는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거나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이것은 일세기의 상황 속에서 남녀에 관한 자세와 특히, 그것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해야 하는 가를 정리해주는 중요한 모범이고 지침(guide line)이다.

그리스와 같은 유럽이나 유대적 관습은 정숙한 여인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이 남편의 보호아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다만 자신의 남편을 업신여기거나 다른 남자들의 신선을 끌기 원하는 창기들이나 정숙하지 못한 여인들은 머리에 쓰지 않았고 이런 풍토 속에서 교회에서 당시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서 세상적 전통이나 관습에서 자유 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주장에서 이러한 당시의 관습을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창기였던 자들로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 데서, 특히 유대주의적인 전통을 깊이 가진 자들은 이런 일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교회 밖의 교회를 보는 시선도 좋지 않았던 데서 이렇게 복음에 장애가 되는 여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런 권면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시대나 사회 속에서든지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처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원칙으로 복음에까지 장애가 되는 이 문제를 바울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미 앞의 10장에서도 봤던 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33)던 바울의 당부는 모든 면에서 필요한 것이다.



Ⅰ. 사회적 규범에서의 질서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4~7, 13)

사회의 美風良俗은 신앙 속에서도 지켜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럴 때 도덕적인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지탄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저것들이 ~’

1. 욕됨이나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라!

당시의 문화적 배경은 대단히 가부장적인 것 같이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이방 종교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고, 복음 속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모자나 의상도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는 사실 없다.

그럼에도 문제가 없는 여인이라면 여자들은 사회적 규범상 어떤 모임에나 예배에 있어서 머리를 가리는 것이 윤리처럼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일반적인 관습들이 거꾸로 행해지는 것이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이고 반대로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도 부끄러움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 조선시대에 복음이 들어 오면서 여자들과 남자들이 따로 앉고 사이에 광목으로 가렸던 풍습, 인도의 현실이 역시 가운데를 가리지는 않지만 남자들과 구별하여 앉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가 구별해서 앉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6)

오늘 날에도 여자들이 머리를 밀고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별로 아름답지 못하고 그런 이유에서 머리를 기르는 것이 그러한 부끄러움을 덮는 것과 같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것이든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즉, 덕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8:1) 14:3~5에 보는 대로 은사 조차도 교회의 덕 세움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고(12, 17, 26) 이 덕은 일세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철학적 덕목이었고 교회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부여하기까지 한다. “①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②여자는 남자의 영광” 이란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7)

신앙은 세상의 규범과 질서를 앞서지만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Ⅱ. 창조의 질서에서 복종하는 표시의 중요성.(3, 8~12)

바울 사도는 먼저 믿음의 사람들이 창조의 질서를 알기를 원한다고 당부한다.

①여자의 머리는 남자.(3)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②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8~9)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③그러나 주님 안에서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11)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룬 복음은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통일하고 하나되게 하셨다.

④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2)

남자들이 우월해 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



Ⅲ. 자연의 본성에도 충실하라!(14~16)

우리의 양심은 특히 그것이 십자가의 피로 구속 받은 양심이라면 올바른 역할을 할 것이고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곳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될 것이다.

①남자에게 긴 머리는 자신에게 부끄러움.(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②여자에게 긴 머리는 자신에게 영광이 되고 쓰는 것을 대신해 준다.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③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다.(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모든 역사를 거쳐서 바른 신앙은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와 구원의 역사를 대적하지 않는 한 당시의 윤리나 규범을 배격하거나 어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도 사회의 윤리, 법도를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첫 창조에 속한 인간의 범죄를 해결하는 것처럼 복음은 역시 창조의 진서를 회복하고 범죄이전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오늘도 이 문제가 가톨릭이나[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4)-사제들의 주교관(冠)] 건전치 못한 신앙 단체에서 강조되고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 바울은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16)고 못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