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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당시에 교회가 모일 때에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은사인 방언과 예언의 사용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울은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이 두 가지 은사의 사용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또 오늘 본문에는 교회의 모임에 있었던 항목들도 기록을 하고 있다는 데서 대단히 중요한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공식적인 종목들이 보다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대에는 필요가 채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여기서도 시작과 말미에서 중요한 권면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 내용을 읽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육의 교제에 있어서 덕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영광과 존귀를 취하셔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사람들의 실수와 무질서로 오히려 이러한 의도와 반대되는 주님께 욕이 돌아갈 수도 있음을 경계로 주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세상의 어떤 모임도 자신들의 위상과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질서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세상에서도 더러 본다.(광쩌우 아시안 게임) 하물며 우리를 우리 되게 하기 위해서 가장 귀한 독생자를 기꺼이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최고의 가치와 영광을 돌려 드리는 오늘의 이 예배에서부터 모든 교회의 모임과 신앙의 삶이 …
Ⅰ. 방언사용의 규칙.(26~28)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바울 사도는 고민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의논을 내놓는다. “그러면 형제자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모일 때도 마찬가지의 의로운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될까!” 바울은 종종 이런 호소를 하고 있음을 앞에서도 봐왔다. [15f 그러면 어떻게 할까!]
“여러분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하는 사람도 있고, 통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26m-새번역)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함에 있어서는 덕 세움을 위하여 행하고 사용하라는 권면이 주어지고 있다. 그것은 행하는 당사자가 나타나거나 들어나서는 안되고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세워주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함을 확인한다.
방언 사용에 가장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다음 두절에 기록되고 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①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②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③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④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7~28)
성경에 애매한 부분은 절대로 없다. 만약에 이런 질서를 지키지 않고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여기에 대한 경계를 지적한 봐가 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3)
여기서 방언하는 당사자가 통역하지 않는 것도 직접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객관성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그러므로 오늘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라는 기준으로 볼 때 사람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 홀로 하나님께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도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4)는 경계는 있다.
이런 모든 신앙적 과제들에 혼란이 없이 평안과 감사로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사람들과 신령한 것을 나눌 수 있는 …
Ⅱ. 예언의 규칙.(29~30)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사람들에게 보다 난해하고 어려운 방언의 사용을 가르친 바울은 이제 예언에 대한 기준을 천명하고 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29) 여기 예언은 분명히 오늘 우리가 또는 오늘 제가 증거하고 있는 말씀 증거와는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당시에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성된 구원의 메시지인 신약성경이 그들에게 주어지기 전이었고 이런 입장에서 그들이 예언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어두움으로부터 주어진 거짓 것인지 조차 구분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령하고 듣기 좋으며 은혜로운 말씀일지라도 질서를 따라 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예언도 역시 ‘둘이나 셋이’ 말하는 것은 방언과 같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순서를 따라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분별할 것, 헬, 디아크리노(diakrino), (철저하게)구분, 분리하다, 반대하다, 식별하다, 결정하다, 구별하다, 의심하다, 판단하다]은 믿음과는 정 반대되는 의심의 단어이다. 믿음으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진리의 분별에 대해서는 철저해야 할 것을 믿음의 사람인 바울이 증거하고 있다.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30) 이보다 분명하고 순종이 필요한 행위는 없을 것이다. 예언을 열심히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사람은 무조건 중단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절제고 순종이다.
요즘은 물론이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들어주는 것이 어렵고 그런 입장에서 잠잠히 들을 수 있는 것은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람들에게 보다 쉽고 좋은 것이라도 절제되지 않으면 그것은 은혜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들어라, 분별하라!”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습니까?]
Ⅲ. 질서를 지켜 화평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라!(31~33)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세 번째 부분에서는 왜 방언과 예언을 그렇게 제제를 받으면서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너희는 다 ①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②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31f)
[배우게, 헬, 만다노(manthano), (어떤 방법으로 든지)배우다, 이해하다]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f) 성경은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라고 당부한다.
[권면을 받게, 헬, 파라칼레오(parakaleo), 옆으로 부르다, 초청하다, 청하다, 위로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 그러므로 신앙적 가르침이나 예언은 이것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31b) 역시 철저한 질서를 당부하는 내용이다.[One by one. One at a time.]
얼마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질서에 철저한가를 바로 다음 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32)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30)는 내용의 설명이자 이유이다.
[제재를 받나니, 헬, 휘포타쏘(hypotasso) 종속하다, 복종하다, 굴복하다, 순종하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무질서가 편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질서가 좋은지 무질서가 좋은지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은 불안정이나 혼동을 조장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화평, 헬, 에이레네(eirene),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때로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보이고 고집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질서는 편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질서가 중요하듯이 영적인 세계에서의 질서는 더욱 중요하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살후3:16)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성령께서는 인격이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질서는 안전한 것, 편한 것, 좋은 것이다. 영적인 세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드신 질서를 지키는 것은 영원과 관련되고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질서를 지킨 자는 이 역사의 마지막에도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의 문 앞에서 후회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의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 내시고 아름다운 조화의 에덴에 사람을 두셨다. 그러나 무질서의 사탄은 첫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의 언약을 어기게 하여(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위계질서를 어기게 함) 비극으로 쫓겨나게 만들었다.
타락 후 이 세상의 역사는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었고 다시 완전한 조화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이 끔직한 고난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고 교회가 바로 이 구원의 진리를 이 세상에 넓혀가는 도구이다.
그럼에도 어둠의 세력은 또 다시 이 질서마저도 헛되게 만들려는 시도를 고린도에서부터 이 역사 속에 계속 해오고 있다. 때문에 주님의 도구인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드림에서도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또 그래야 새로운 영광의 회복된 역사 속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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