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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4:34~40 2010-11-21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14:3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이 14장에서 계속 방언과 예언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v1~13에서는 고린도 교우들이 다 예언하기를 원하지만, ①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를 사용하라. ②모두가 이해 가능한 말을 하라. ③허공에다가 말하는 것처럼, 외국인처럼 하지 말아라.는 권면을 생각 했었다.

v14~25에서는 ①영으로 기도하고 도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②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③신 불신간의 모든 사람이 주님의 뜻을 배우게하고 깨닫게 하라!

V26~33의 지난 시간에는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요청과 함께 ①방언사용의 규칙. ②예언의 규칙. 그리고 ③질서를 지켜 화평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라!는 당부를 생각한바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14장의 결론적인 말씀이다.



Ⅰ. 창조와 타락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는 지켜졌다.(34~36)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결론을 내리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 속에 정해 주신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모든 교회에서 여자들의 침묵이다. 이 내용으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고린도 교회의 은사의 혼란의 앞에도 여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as in all the churches of the saints.]” 라는 말씀은 적어도 어느 시대 어느 곳의 교회에서나 이런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어떤 규범은 문화나 인종을 초월하는 것들이다.

때문에 ‘문화가 발달하고 여권신장이 많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고리타분한 것은 교회에서 이제는 개선이 되어야 되지 않는가!’[알베라 미켈슨(Alvera Mickelsen)과 캐서린 크로거(Catherine Kroeger)]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③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②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①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어찌 보면 여자들을 차별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적어도 남녀의 기능성의 차이일 뿐이지 차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손으로 걸을 수는 있지만, 발로도 집을 수는 있지만, 분명 정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불편한 것과 같다.]

특히 이 부분의 가르침은 목회 서신이라고 하는 디모데전서2:11~15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①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②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③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35f) 물론 이것은 신앙적으로 갖춰진 남편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불신의 남편의 가르침의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속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35b) 했는데 [부끄러운 것, 헬, 아이스크로스(aischros), 보기 싫은 것, 버릇없는 행동, 추한, 더러운, 적당치 못한, 천한] 앞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전서에서 같은 말을 사용한 바 있다.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11: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36) 여성들과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대부분 감성적인 여인들은 은사를 자신만 받은 것인 양 교만한 것을 더러 볼 수 있는데 대단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요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실 수 없는 부분이다.

남자나 여성은 서로 할 수 없는 역할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는 상대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겸손으로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럴 때 교만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성의 차이는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럼에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차이점으로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Ⅱ. 은사 사용에도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라!(37~38)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음에도 언제나 자신만이 홀로 선지자요 신령한 자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권면 조차도 듣지 않는 구제불가능의 상태가 되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바울 사도께서 이런 당부를 하고 있다고 할 때는 적으로 심각한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 된다.

그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마10:24~25) 라고 지적하신 바 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헬, 데케오(dokeo), (좋게)여기다, 상상하다, 믿다]…(37)

언제나 문제는 신령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신령한 자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치료책이 없다. 자신의 부족함과 세속 됨이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러한 것 때문에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 올바른 믿음임에도 교만하게 되는 것 또한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앞에서도 바울은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18)고 당부 한바 있고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고 경계한바 있다.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37b) 주님의 명령은 신비한 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정으로 권면하는 편지로도 올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확신하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계시로 들려질 수 있다.[오해가 없기를]

바울의 편지를 주님의 명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요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38) 어떤 사본에 “알지 못하는 자로 두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그를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남에게는) 그가 깨달을 때까지 두라는 말씀이자. (자신에게는) 지금 어린아이와 같은 깨달음과 청동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소화 되지 않은 것은 그런 대로 두고 가면, 언젠가는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교훈이 되기도 하다.

교만한 사람은 남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겸손히 사랑과 믿음이 긷든 편지 한 줄도 주님의 명령으로 받을 수 있는 겸손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할 것이다.



Ⅲ.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금하지 말 것이지만 품위와 질서대로 하라!(39~40)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바울 사도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것들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이거나 그것을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금기 시 하지도 말 것을 당부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39)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라는 감정으로 “내 형제들아!” 라고 부른다. 언제나 바울은 바른 교훈을 주면서도 그것이 너무 자신들을 멀리하려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판단으로 듣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교회와 모든 사람이 덕이 되고 유익이 될 수 있는 예언을 사모하라는 권면은 어쩌면 바울 사도다운 당연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고 잘 못 사용될 수 있는 방언도 하나님께서 개인을 위해서, 아니 영의 신비함으로 마음이 깨달음이나 열매가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금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럼에도 예언은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방언은 금하지 않는 소극적인 부분에서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권면과 당부가 다가 아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 신앙에 있어서 품위는 더욱 지켜져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품위는 지키려 하면서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고린도 교회와 같은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 교훈은 우리 믿음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교훈이다.

[품위 있게, 헬, 유스케모노스(euschemonos), 어울리게, 적당하게, 교양 있게 단정하게, 예의 바르게, 점잖게, 정직하게]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철없다, 유치하다’ 라고 흉본다. 교회에서는 하늘의 가치에 어울리는 품위와 예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사도의 권면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이 분별의 기준은 물론 성경말씀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 당시에는 이런 귀중한 기준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가 이 불변의 원칙을 가지고 믿음생활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