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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의 교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공적인 것이 되었든 개인적인 것이 되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신앙을 키우고 도전을 주는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영적인 도구이다. 믿음 안에서의 만남은 그냥 같은 곳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어느 정도 다룬 다음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축복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이 마지막의 내용도 질서를 갖춘 문맥을 볼 때 바울이건 성령의 감화 때문이건 놀라운 사랑을 읽게 된다.
먼저는 교회들간의 안부를 나누고 마지막에는 축복하지만 그 사이에는 사랑과 그렇지 못한 대상들에게는 두려운 저주를 말하면서 그것이 주님의 오심에서 경계됨을 선언하고 있어서 오늘 제목으로 삼았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도 신앙에 대한 엄격한 기준으로 축복하고 저주하는 하나님의 사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모범을 본다. 사실 축복하는 좋은 내용은 쉽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를 신앙 때문에 저주까지 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다.
과연 ‘대상이 이 책망을 소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이유가 된다. 분명히 책망과 권징은 필요한대 그것을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자체를 단절해 버릴 위험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리도 교회에도 저주에 가까운 칼을 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용맹스러운 하나님의 사자이다. 당나귀에게도 채찍과 당근을 쓰는 유능한 농부가 나귀를 가장 가치 있게 부릴 수 있다는 데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고, 특히 그것이 주님의 교회 속에서 바울처럼 이런 양면을 다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가 우리 교회 속에서 이러한 양면의 도구를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고 또 우리가 지원하고 세워가는 교회들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튼튼한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
Ⅰ. 교회들의 문안(19~21)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아시아와 아가야는 두 사이에 에게 해(Aegean Sea)를 두고 있고 문화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의 안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고 있다.
연이어 로마의 유대인 추방으로 고린도에 오게 되어 자신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거론하는데 이 소아시아에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이들 부부는 자신의 집에 교회가 모이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보는 대로 이들 부부는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같이 고린도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사도행전 18:2~3에서 보는데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실 장막을 만드는 일이 그다지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음을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시아에서도 여전히 집을 가지고 있고 그 집에 교회가 모이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복 주시면 가능함을 깨닫는다.[로마에서 추방을 당했어도 아시아에 건너가서도 여전히]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았던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주 안에서 … 간절히 문안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문안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①거룩하게[헬, 하기오스(hagios), 구별되게, 순결한] ②입맞춤으로(롬16:16; 고후13:11; 살전5:26; 벧전5:14, 화해-평화, 일치-하나됨, 부활-격려) ③서로 문안하라(경례하다, 환영하다)”(20)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21) 바울 사도는 더디오에게 시켜서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편지가 분명히 바울로부터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이 마지막에 인사말이나 싸인을 한 것으로 확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갈6:11; 골4:18; 살후3:17) 요즘 금융기관에서 도장이 아닌 싸인을 받는 이유도 이런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서로 문안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거룩한 관계 신령한 관계가 교회 안에서의 관계 속에서나 교회들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신령한 교제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
Ⅱ.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고 역사이다.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그 사랑을 거절한다면 저주는 당연한 것이다.
①만일 ②누구든지 ③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④저주[헬, 아나데마(anathema),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 파문 당하는]를 받을지어다
사실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사람이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헬, 마란 아다(maran atha), ‘하나님이 오셨다,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 아람어에서 유래 되어 초기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되었던 말이다.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 속에 사는 사람들의 기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란 아다”를 외치는 성도들은 자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세상에 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나 보물을 땅에 쌓아 놓은 사람들은 절대로 주님의 오심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가름해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는 신앙 고백이다.
하늘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살고 “주님,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Taxi driver of Bangladesh]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에서도 같은 고백을 보게 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헬, 아멘 나이 에르쿠 퀴리에 이에수(Amem nai erchou kyrie Iesou)]”(계22:20)
“①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②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고백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Ⅲ. 은혜와 사랑의 축복(22~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사랑의 사도는 그의 편지의 마지막을 축복으로 마감하고 있다. 사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 죄인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무슬림 사회의 안타까움]
그럼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23) 바울 사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지금 바울 사도께서 이 말을 불신의 어떤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게 하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교회는 당연히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확신하는데…]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24) 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나의 사랑이” 그럼에도 바울의 사랑이 이를 수 있는 장소는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다.
“너희 무리[헬, 판톤 휘몬(panton hymon), 너희 모든 사람들]와 함께 할지어다” 비록 바울을 대적하고 잘못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축복은 편견이 없다.
은혜와 사랑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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