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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1:1~7 2011-02-06
모든 위로의 하나님  
※ 이 말씀의 음성메시지는 앞부분이 녹음되지 않아 나중 혼자 녹음하여 붙여서 현장감이 없습니다. 애청하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고린도후서는 전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된다. 교회의 문제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앙적 기반과 논리를 다루고 특히 15장 같은 경우는 부활의 논리를 성경 중에 가장 구체적으로 논했던 반면에 이 후서는 소위 말하는 교리라고 하는 신앙적 논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격한 감정까지도 표현되고 있는 바울 사도 자신의 변증서 같은 느낌을 갖게 하기까지 사도권에 관한 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내용이 주 내용이다. 사실 중간의 8~9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런 내용들이다.

아직도 신비로 남겨둔 고린도 서신의 또 다른 내용들이 있음직한 여운들이 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2:4) 한 것이다.

이런 내용은 v3, 9, 7:8~12의 내용들과 연관해서 [눈물의 편지, 준엄한 편지] 라고 하는데 이러한 표현으로 볼 때 고린도전서는 아닌 것 같으나 이런 언급을 하고 있는 이 후서도 아니라고 볼 때 또 다른 간절한 눈물로 쓴 호소의 편지가 고린도에 보내진 것 같은데 오늘 우리는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편지가 있었건 없었건 오늘 우리가 이 고린도전, 후서를 받아 읽게 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4:6m)는 말씀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후서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본문의 내용에 충실하고 말씀 되어지고 있는 부분에서 이해를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편지가 어떤 면에서는 격한 바울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신의 변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는 이 성경의 주제 같은 말씀을 4:5에 읽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오늘 우리조차도 성경으로 자신의 논리나 생각을 합리화 하려는 간악함을 버리고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있고 화평이 있음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Ⅰ.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 사도는 몇몇 서신들을 제외[빌, 살전, 후, 몬]하고서는 한결같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는 고백으로부터 그의 서신을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들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는 확신이 그의 평생 동안 그의 삶의 확신으로 작용하였다.

이런 부분은 이 서두의 문안에서뿐만 아니라 본서의 내용에서도 강하게 증거되고 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11:5)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12:11)

이러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강한 도전은 사실에 있어서는 자신을 변호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에 대한 정당성의 선언이다. [특히 고린도에서의 사도권]

만약에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문제가 있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 조차도 의심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교우들의 구원의 문제에까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단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논지는 바울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냈던 디모데에게까지도 확신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1f) 이라고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1b) 지금 교회의 당파심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파당의 우두머리 격의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투쟁을 중지해야 할 이유를 인사말에서부터 증거하고 있는 표현이다.

어느 지역에 있든지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면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교회의 소유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세상과 달라야 할 하나님의 백성을 표현하는 것이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헬, 하기오스(hagios), 드려진, 구별된]에게” 라는 표현이다. 교회는 땅에 있지만 세상의 논리가 통하는 곳이 아니라 하늘의 가르침이 통해야 하는 곳이다.

OT의 분리된 제사장직분의 삶이 복음 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성도들에게 적용되었고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인(벧전2:9) 구별된 성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경외해야 할 하나님,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그 하나님은 다만 두려움의 대상만이 아니라 은혜로우시고 가까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소개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2)

그 하나님은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을 대가 없이 선물(은혜)로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죄를 확신하는 자들마다 평강을 값없이 누리게 하셨다. 여러 분 모두에게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한다.



Ⅱ. 모든 위로의 하나님.(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칭송, 칭찬)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할렐루야!

OT성경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졌지만 복음 속에서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럼에도 OT의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약속의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그의 피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자 아버지가 되심을 증거하고 계심을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두렵던 OT 율법 속의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개하시기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사실 본래 자비는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 속에 사용되었다. ‘오, 자바로우신 하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어원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완전한, 풍부한, 충분한을 의미하는 [헬, 파세스 파라클레세오스(pases parakleseos)] 하나님의 위로는 완전하고 넘치는 위로가 되신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사람이 완전하고 넘치는 위로를 풍성히 누리는가가 4절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환난, 헬, 들립시스(thlipsis), 억압, 압박, 핍박, 환란, 고통]

이것은 일찍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 말씀하셨던 것으로 생소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19~20)

세상이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에게 주님의 위로는 넘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그 큰 위로를 받은 사람은 같은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위로[헬, 파라칼레시스(paraklesis)]가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져서 하나님의 위로가 끊기기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가르친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b)

위로는 상처받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인데, 믿음 때문에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이 세상 끝날까지 주님의 위로가 멈추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할렐루야!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2:10)

하나님께서 믿음의 백성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위로 받은 사람이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항상 넘치는 위로를 받으시고 그 위로를 가지고 다른 환난 당하는 자들을 서로서로 위로하는 여러분 모두가 …



Ⅲ. 고난과 환난을 반드시 갚아주시는 하나님.(5~7)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하나님은 죄로 인한 것이거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백성으로 사는 이유에서 오는 어떤 손해나 불이익은 물론이고 고난과 환난을 반드시 위로로 이 세상에서 갚으시고 영원한 세계 속에서도 상급을 준비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상급은 늘 갑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죄에 대한 형벌로 오는 고난이나 환난을 갚아주신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 고난이 그리스도 때문에 온 것이라면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이 된다.

여기에 우리에게 넘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 모든 고난이 다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바울 사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사는 한 고난은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난은 피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에 비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여러분도 고난이 많으면 위로도 넘침을 확신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가운데 환난이나 위로가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나눠져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 다음 절의 내용이다. 여기에 [우리]와 [너희]를 대조해 보면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6)

바울 사도는 아직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체로 그대로 있음에도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능력 때문에 오히려 오늘의 마지막 절은 소망으로 감사하고 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7)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우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망’ 때문이었다. ‘소망’[헬, 엘피스(elpis)]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을 의미한다. 지금은 혼란도 있지만 결국은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격려는 베드로 사도도 함께 주고 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9~10)

오늘 우리 교회도 많은 문제들이 있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서로 마음이 상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편에 서서 고난과 환난을 감당하고 있다면 거기에 반드시 갚아주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와 상급이 있을 것을 확신한다.

아직도 온전치 못하지만 의로우신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과 성령을 의지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의 역사가 있을 것을 소망의 견고함 속에서 확신하고 헌신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