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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빠져나올 만큼 아시아에서 당했던 견디기 힘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역사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연약함 때문에 사람은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권면을 주고 있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은 지금까지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경험적 고백과 현재와 미래도 역시 성도들의 기도의 협력으로 위기와 절망에서 건지실 것이기 때문에 기도로 자신들을 도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장래에 대한 확신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지혜나 명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하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서로가 진실함과 신뢰로 의지해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을 세상은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주님께서 빛이시고 진리이신 사실이 세상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빛으로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바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특히 마지막 시대가 가까울수록 위기에 처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은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일세기에만 해도 복음의 시초였기 때문에 카타콤 같은 로마의 지하 무덤에 살면서 신앙을 지킨 주님의 백성들을 당시에는 착한 사람들이 곡식을 주기도 하고 도왔던 것은 그들을 도와 줌으로서 자신들이 그들의 믿는 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다신교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가 종말을 향해 갈수록 믿음의 사람들은 진실하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환영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를 도울 수 있을 때 계산 없이 돕는 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 주님은 약속하고 계시다.
사실 오늘 본문 마지막의 고백처럼 사람들 상호간에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알량한 인간의 지식이다. 이래서 안다고 결혼해 놓고 새롭게 눈을 뜨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실망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부부싸움도 잦아 지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3:9~12에서 바울이 고백 하는 것처럼 우리의 지식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성경과 하나님께 관한 것뿐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도 역시 부분적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싸움보다는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그의 생애에서 고요하고 평안할 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사도행전에 그가 등장하면서부터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추격과 핍박으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것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바울은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마케도니아를 거치면서 과거에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추억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데까지도 오지 못했을 것이라 고백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8)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도 살 소망을 잃을 정도에까지 이르는 어려움을 성령의 사람이었던 바울 자신도 겪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도 백성들도 환난은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다운 모습은 이 환난조차도 내어놓고 나누기를 원하는 그의 자세이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환난을 당한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돌아 봄으로서 지금 환난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고 자신들의 고통과 아픔을 나눌 수 있다는 자긍심과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춰둬야만 할 어려움도 없고 그것을 들으면서 격려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의 어려움과 아픔을 내놓고 기도하고 나눔으로써 환난이나 고통이 반감하는 경험은 성숙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신앙의 또 다른 교제의 자세이다.
우리의 교회 속에서 고통을 내 놓는 것이 부끄럽고 그런 것들을 흉보는 유치한 모습은 벗어야만 할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8b) 라는 것으로 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으로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다. 천국이나 기대하자!’ 할 정도까지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f) 라고 고백할 정도였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는 고린도의 교우들에게 숨기지 않는 소탈함을 보게 된다.
사실 이 정도의 열린 삶이라야 고통은 반감이 되고 기쁨은 증가할 수 있는 신앙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자신을 내어놓는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하는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성경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머리나 현실을 더 의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힘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게 될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다.
오늘도 우리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환난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Ⅱ.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10~11)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그럼에도 이 두 번째 단락은 더 진보된 신앙적 권면과 고백임을 배운다. 이런 우리 모두의 고백은 과거나 현재와 미래의 한 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지속됨을 고백하는 모습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10)
여기에 주님의 은혜의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절망과 고통에서 건지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현재의 닥치는 어려움도 이길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미래에도 같은 역사를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2:17b)는 고백을 가능케 한다. 때로는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는 한이 있어도 아직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것은 생명의 권한을 가지신 주님께 우리가 육신 속에서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길이는 어두움의 권세인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심을 잊지 않는 …
그러나 이런 일에도 서로의 도움이 나눠지게 되는데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11) 성도들 상호간의 기도의 효력이 적지 아니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나를 위하여’가 아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원리를 나누고 누려야 한다. 아무리 신령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호소가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는 순환의 흐름이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백성들의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과 더불어 소화하고 해결해 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나 일꾼들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은사를 얻게 되고 그 은사를 뜻에 합당하게 사용함으로 많은 사람이 그 은사를 인하여 감사하게 되는 복의 교통과 은혜의 나눔이 원활하게 나눠질 때 교회는 더 많은 감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Ⅲ.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한다.(12~14)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바울의 이 마지막 고백은 성도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하고 조심성을 필요로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12)
아직 천국이 아닌 세상에서 고린도 교우들을 대하는 사도의 경건을 배운다. 비록 오해도 많고 경건치 못한 면도 많은 고린도 교우들 … 그러나 사도는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뒤에 거절되는 것은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이다. 대상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의 관계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자세가 자신에게 경성하게 하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대상의 반응에 관계없이 다만 그가 주님의 몸 된 교회 속에 있다는 사실로 세상의 처세술이 아닌 하늘의 예우로 대할 때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한 자긍심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12b)고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원리는 세상의 지혜이지만 상대의 반응에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대하는 모두가 될 때 교회는 벌써 세상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심지어 고린도 교우들 중에는 바울의 반대자들의 논리에 따라 바울의 편지가 진실치 못하다는 비판까지 하고 있는 입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드러난 것 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그리고 진실히 말하고 있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13~14)
때로 서로의 오해가 풀리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부분적일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날에 서로의 진실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는 서글픈 고백이다.
이 말씀 역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럼에도 주님의 다시 오심의 날을 보다 소망적으로 기대하는 신앙의 사람 바울을 보는 것이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14)
사실 이것을 기대이긴 하지만 주님의 날에야 진실을 알게 될 경우에는 후회할 일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진실된 사람을 오해하고 믿음을 버리게 된다면 참으로 그것은 안타까운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주님의 오시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더 빠른 시간 안에 오해와 아픔을 해소하고 화해 하는 것이 서로에게 큰 복일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마지막을 기대하면서 까지 진실한 바울 사도의 안타까운 고백은 우리의 교회에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오해와 아픔 보다는 마지막 다시 오실 주님 앞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서로에게 자랑이 되는 …
오늘도 우리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환난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
주님의 백성들의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과 더불어 소화하고 해결해 가는 교제를 더욱 필요로 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서로가 자랑이 되고 영광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를 현실에서부터 나눠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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