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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를 방문하고 서로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소원하고 더불어 그 은혜 속에 드리는 물질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유대에 가져가기를 바라면서도 이러한 계획들이 결코 육신의 편리나 바램에서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미쁘심 속에서 주님께 영광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우리가 읽은 시작과 끝 부분은 편리에 의해서 함께 생각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조금은 다른 내용으로 차이가 있고 이것 역시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변경한 것이 아님을 바울은 간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의 중심은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우리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아니라’ 하는 부정함이 없이 오직 십자가까지도 “예”로 순종했던 거룩한 모범을 제시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는 오직 “아멘” 함으로서만 영광을 돌리게 됨을 배우게 된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만약에 누구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이 된다면 그것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나 자신에게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못함을 가르치고 있다.
때로는 우리의 생명 즉, 목숨을 요구하시는 것조차도 “아멘”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며 거절된다면 그것은 빛의 자녀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오직 신실하시고 全知全能하신 분이기 때문이다.(여호와 이레)
이 역사 속에 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의 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하시려고 거듭난 생명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그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곧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경계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살길이고 이것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기 때문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b) 라고 말씀하셨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 29) “너희는 삼가[조심해서]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12:25)는 말씀들을 주신 것이다.
어떤 시간이나 조건 속에서도 주님께 오직 “예” 즉, “아멘”으로만 영광을 돌리는 …
Ⅰ. 육체를 따라 계획하지 않아야 한다.(15~17)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바울 사도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상대에게 은혜를 얻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확신과 감사를 고백하는 당연한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갔다가 마게도냐로 돌아왔다가 고린도를 거쳐서 유대로 갈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여기도 역시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확신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상대편의 참여도 기대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16b) 앞에서도 이런 표현을 더러 볼 수 있었지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고 거기에 따른 반응으로 그들의 도움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은혜라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 받을 때 더욱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은혜란 선물이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 나눠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6)
그러나 이런 바램과 계획도 자신의 육체적 편리나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아니라 신중한 생각과 계획이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17)
그래서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서 번역하기를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한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한 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은 경솔히 계획하거나 육체에 따라서 계획하지 않아야 한다. 늘 기도하고 심중한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하고 하나님을 앞서지 않아야 한다.
우리 교회와 모든 교우들이 영적으로 이런 신중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과 삶과 인생을 계획하고 실행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는 …
Ⅱ. 예수 그리스도께는 예만 된다.(18~20)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명령에 “생각해 볼께요!” 라거나 “그건 안되겠습니다.” “그런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라는 식의 답변을 절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은 우리(나)를 위해 친히 그분의 독생자를 제물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성격상 절대로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3:4) 그렇기 때문에 “아멘(예)”하고 순종해도 절대로 손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종들은 물론이고 주님의 백성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그분의 미쁘심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2. 예수 그리스도께는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다.(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누구를 통해서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든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예만 된다 하였다.
이 세상에서 ‘예’만 되는 데가 어디인가? [군대] 비록 이 땅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군대일지라도 거기서 상관의 명령에 ‘아니오’를 했다가는 (명령 불복종 죄)로 재판을 받게 되고 전시에는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다. 하물며 하늘의 군대의 절대적인 명령에 ‘아니오’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허락되지 않았다.
3.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주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 예가 될 수 있는 범위를 분명히 한정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만 하면 무조건 ‘예’가 아님도 가르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된다는 말씀이다. 사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악용하고 도용해서 문제를 만들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약속이 아닌 인간 안에서 나온 말에 ‘아멘’ 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f) 율법의 마침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그런 입장에서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가 되신다.
그러므로 창세로부터 예언된 언약의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복음을 이루신 분이시다. 이런 입장에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서 확증되고 이 구속을 중심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은 진실(아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시는 것에 “아멘”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되는 데서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는 말씀이 가능한 것이다. 강요한다고 무조건 ‘아멘’ 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고백과 말씀에 “아멘” 하지 않는 것은 완악하고 죄악된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리는 …
Ⅲ.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려고 성령을 주셨다.(21~24)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사실 구원의 표로 성령을 주셨지만 이런 분별을 위해서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 오시므로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게 하시며 위로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특히 그 대상을 “우리를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같은 은혜를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도 동일하게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본문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는” 성령은 [보혜사] 즉, 위로의 역할도 하시고 사명을 감당하게도 하신다. 교회에 주신 복음 사역의 역할은 오직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역시 우리에게 와 계신 성령은 인치심과 보증의 표다. 이 성령은 그의 소유라는 확신으로 도장 찍으심과 보증으로 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주신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확인하고 있다.(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말하고 그 계획이 바뀌게 된 이유를 v15~17에서 설명하고 여행 계획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근거함을 확인하여 자기의 진실성을 v18~22에 증거한 뒤 마지막으로 여행 계획을 다시금 변경한 이유를 이 두절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23)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증인으로 내세우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살전2:5, 10)
그러면서도 가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 교우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행했더라면 분노하고 고린도 교우들에게 항의하고 책망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들의 장성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감당하지 못했을 수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 마지막 절은 격려의 말로 도전을 주고 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4)
이 한절에서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원리를 배우게 된다. 사실 신앙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앙적 교육이란 서로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돕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기쁨을 돕는 것이라 했다.
이런 원리는 직분과 은사의 사용에서도 말씀하고 있다.(롬12:3~8)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2~13)
결국 믿음이 세상과 죄악을 싸워 이기는 데까지 온전히 자라도록 돕는 것이 교회요 말씀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기관도 믿음을 주관해서는 안된다.
성경 외에 어떤 지침을 만들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는 바른 교훈에도 아멘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과 육체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안에서만 예가 되고 이러한 일들을 함께 순종하고 수용하는 자세로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또 이런 일의 바른 이해와 순종을 위하여 성령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와 계신다. 어떤 형편이나 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좇아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리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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