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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 2:1~9 2011-02-27
근심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에 이르러 그들의 문제를 바로잡고 자신에 대한 불신도 해결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드린 연보로 유대의 어려움을 당한 교우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두 번째 갔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쓰여지고 있는 1:15~16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라는 말과는 다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시작부터 안타까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우들을 향한 기대가 기대로 끝나고 말았고 마음 속에 그런 것들로 인한 근심을 갖게 되었다는 고백을 바울 사도로부터 듣게 된다. 오늘 분문 아홉 절에 [근심]이란 말이 아홉 번 나타나서 비교 한다면 한절에 한번씩의 근심이 기록된 샘이다.

사실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걱정했던 일들은 잘되고 기대했던 사람으로부터 근심을 갖게 되는 일들을 더러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을 향한 소망 외에는 기대하는 것 자체가 별 가치가 없음을 배운다.

기대하고 바라던 사람으로부터 점점 실망을 느끼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으로부터는 소망과 감사를 갖게 되는 일들은 이 세상에 있는 한 교회도 예외가 아닌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중에 바울은 이 근심에 대한 이야기를 7:8~11에서 한 번 더 한다.(4절-8회)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 내용에서 핵심은 10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모두가 근심의 과제를 줬어도 이런 근심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울 사도는 언제나 세상 근심을 한 사람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히 고린도 교우들의 구원을 위하여 걱정하고 있는 것이고 7:11에는 고린도 교우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오늘 우리의 근심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말씀과 더불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돌이킴으로 오늘 우리의 삶에도 고린도 교우들에게 나타났던 같은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기를 ¨



Ⅰ. 바울 사도의 근심.(1~3)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근심[헬, 뤼페오(lypeo), 마음 아프게 하다, 괴롭히다, 슬프게 하다, 고통을 주다, 고민하다 등등]”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근심과 걱정으로 하는 일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 이유에서 기도조차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헬, 메림나오(merimnao), 근심하다, 걱정하다)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당부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 염려(헬, 메림나(merimna), 걱정, 근심)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같은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1) 라고 고백한다. 물론 바울 사도는 나중 세 번째 고린도에 갈 것을 13:1~2에서 밝히지만 거기에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인다.

2절을 공동번역에서는 “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자신이 결국 고린도를 가려던 결심을 바꾼 이유가 그들에게 이르러 엄하게 꾸짖고 책망하는 것보다는 회계할 기회를 주어 나중에 오히려 기쁨으로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밝힌다.

우리는 읽을 수는 없지만 바울이 고린도에 가는 대신에 간곡한 호소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 내용을 v3~4에서 읽게 되는데 그들이 자신의 권면으로 돌이킨다면 기쁨이요 감격이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보게 될 것에 대한 근심이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3~4f) 라는 내용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빌4:1)고 부르는 것 못지 않게 고린도교회도 그에 지지 않는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14에서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이다.

사실 여러 인간사에서 애당초부터 기대도 안 했다면 모르지만 기대했던 사람으로부터 실망하는 일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주님의 교회 안에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로에게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관계가 가장 좋지만 그런 대상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Ⅱ. 근심하게 하는 사람.(4~6)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는 대신 간절한 호소를 담은 편지를 썼던 것은 그들에게 근심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하려 했던 것이라고 바울은 고백한다.

사랑하는 사람, 기대하는 사람이 근심하게 할 때 그것은 더 견디기 어렵다. 시져가 가장 신뢰하던 브루투스의 칼에 찔리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는 역사 속에 너무나 유명한 일화가 되어 있다.

아주 하찮은 것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먹는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14:15)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빌립보 교회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과 빌립보 교우들 그리고 바울에게서 서로에게 근심을 덜어 주려는 아름다운 마음을 배운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빌2:26~28)

사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바울 사도에게 근심을 끼쳤다면 그것은 바울에게 만이 아닌 고린도 교우들 모두에게 근심을 끼친 것이 되고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오히려 지나치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고백을 듣는다.

그리고 근심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한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이유로 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책망 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5~6)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에 근심을 줄 수 있는 상황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는 자신을 기대하는 사람들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근심보다는 평안과 위로와 감사를 끼치는 …



Ⅲ. 근심하지 않게 하라!(7~9)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고린도 교회에 근심을 끼친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하고 있지 않은 것도 바울 사도의 사랑이었다. 마침내 그는 회개를 하였고 그럼으로 다시 바른 신앙을 회복했다면 오히려 지나친 책망이 그를 은혜에서 떠나게 할 안타까움을 가지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7)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자에게 사랑을 당부한다.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8) 여기 “용서[헬, 카리조마이(charizomai), 호의로서, (친절, 용서, 구조하는 의미에서) 아무 이유 없이 허락하다, 인도하다, (값없이)주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어근이다.

결국 그로 하여금 자신의 회개에 합당한 대우를 받게 함으로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은혜와 사랑을 느끼게 하라는 당부이다. 거기에다 사랑을 더하면 비록 과거에 범죄했을지라도 확실한 은혜와 사랑의 회복에 더욱 견고한 신앙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9) 결국 바울의 안타까움으로 쓴 편지는 그들을 혼란케 한 사람에 대한 처벌 보다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것임이 여기에도 들어난다.

모든 일에 있어서 진리를 순종함이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고 특히 여기 ‘순종하는지 그 증거[헬, 도키메(dokime), 시험, 시련]를 알고자 하여’에서 시험 중에도 순종하는가를 보고자 해서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근심을 끼치는 것은 옳지 않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자로 사랑을 베푸는 자로 끝까지 남아야만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상 근심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것은 다만 우리의 바램일 뿐이다. 베드로 사도 조차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하나님의 뜻을 위한 근심으로 돌리고 사람에게는 근심을 끼치지 않으려는 조심성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솔로몬은 그의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잠언서를 통하여 이런 권면들을 주고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의 근심을 친히 십자가에서 모두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을 우리의 관계의 중심에 두고 자신이 근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형제 자매들에게도 근심을 끼치지 않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