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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 3:12~18 2011-03-27
수건  
우리는 지난 시간에 새언약 속에 영원히 누릴 영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구약에만 익숙해 있던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지나면 차차 사라질 모세의 얼굴에 반사되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처럼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쇠퇴하는 것으로 잘 못 이해할 좋지 않은 가능성 때문에 이스라엘과 모세의 얼굴 사이에 가려졌던 수건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릴 수 있는 OT의 율법과 NT의 복음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오늘 나누게 되었다.

이 말씀 역시 지난 시간에 에로 들었던 출애굽기34:29~35의 말씀[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을 근거로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참고로 해야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다.

또 오늘 내용에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수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 되어야 말씀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수건[헬, 칼뤼마(kalyma), 덮개, 휘장-6회←(헬, 칼륍토(kalypto), 덮다, 숨기다)]”≠[요한복음11:44, 20:7의 헬, 쑤다리온(soudarion), 손수건, 즉, (얼굴의 땀을 닦거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덮는 데 쓰는) 수건]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결국 본문의 수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해결되지 못한 죄와 관련된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있고 다음주에 보게 되겠지만 이 고린도후서4:6의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는 말씀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세 제자들만을 대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을 때에도 다른 아홉 제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볼 수 없었던 영광의 빛을 보이셨던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막9:3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눅9: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이것은 육신을 입으시기 전 주님의 본래의 모습이며 감사하게도 모든 성도들이 미래에 입을 영광의 광채이기도 합니다. 죄로 죽어 어두움에 영원히 유리할 우리들에게 이러한 영광의 광채를 십자가로 찾아주셔서 오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시다.

캄캄한 흑암만이 죄인 된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지만 오늘도 우리 속에 빛으로 오셔서 어두운 이 세상의 비극보다는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보게 하시는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



Ⅰ. 영광이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바울.(12~13)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과거의 모세는 ‘왜 자신에게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가렸을까?’에 대한 많은 의문들과 해설들이 있겠지만 감출 수 밖에 없는 모세나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분명히 좋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완고하고 패역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된 것일지라도 볼 자격이 없는 죄인들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서 전달 하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임시적으로 묻은 것과 같은 모세의 얼굴꺼풀에 나타난 광채에만 마음을 둘 수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또는 얼굴에 칠해진 것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후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모세를 통한 언약에 손상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든 십계명을 받아 든 모세는 많은 우려로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수건으로 가릴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v11b에 “…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자신 있게 고백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12) 라고 확신에 찬 선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지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영광의 확신과 자신감에서도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13)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얻은 영광은 믿음 안에만 지속적으로 서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데서 가릴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은혜의 신비를 서로 나누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조차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라고 당부한다.

이왕에 잃지 않을 귀한 하늘의 영광을 나눠 받은 우리 모두가 그 영광 속에서 그 영광을 받기 위한 이 세상에서의 오늘의 아픔과 미래에 가져오실 영광을 숨김없이 나누고 베푸는 …



Ⅱ. 가리고 보는 한계.(14~15)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사실 수건은 죽은 사람의 얼굴이나 가리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셔서 “…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3~44)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20:7)←부활하신 예수의 빈 무덤

사실 OT성경에는 메시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따라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만다. 그래서 이 땅에 약속에 의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오히려 대적해서 심지어는 당시의 가장 처참한 사형도구인 십자가에 자신들이 죽이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로마의 정치적인 힘을 빌려서까지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까지 이르고 만다. 물론 하나님은 이 희생을 우리의 구원의 역사로 삼으셨지만 …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갸웃거리지만 그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큰소리치던 그들은 그랬다.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반대만 하고 받아드릴 수가 없었고 바울 사도는 그것이 그들의 눈에 가리는 수건이 덮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만 감춰진 복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꼭 같은 자리에서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역시 수건이 저들의 마음을 덮었기 때문이라면 그 수건을 벗고 맑은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해결책은 여전히 “…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4b) 그리스도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없어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던 수건이 벗어지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우리들에게는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v6) 했는데,

유대인들이 수건을 벗을 수 있는 복음을 먼저 받았음에도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육신의 눈은 밝으면서도 영혼의 눈은 어두워서 아직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15) 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죄인을 인도하는 도구임에도 그것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수건이 마음에 덮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불쌍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 …



Ⅲ. 주께로 오는 자는 영광의 빛을 본다.(16~18)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앞의 모든 문제점의 해결은 바로 여기에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 얼마나 간단하고 단순한가! 그러나 완악한 마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아직도 완악하고 고집 샌 상태로 남아있다.

사실 첫 장막인 성전의 지성소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9:8)

그러나 그 영광의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는 순간에 열리게 되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27:50~51)

이 부분에서 두 번째로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지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영 즉, 성령께서 자유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b~32)고 선언하신 바 있다. 사실 무엇을 자유롭게 볼 수 없는 상태는 묶여있는 상태로 그것은 영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죄에 묶여있기 때문이고 이 죄를 풀고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의지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당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말한바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런 고백과 확신과 감사를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들의 태생이나 행위로 말미암는다면 불가능하겠지만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는 바울의 고백과 같은 기대와 소망이 믿음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아직 많은 육신의 제약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는 바울의 격려를 기대한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미래에는 그 영광에 들어가리라는 기대를 가지는데 그것은 절대로 사람의 방법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고백과 확신이다. 우리 속에 영원토록 함께 하시려고 와계신 성령은 이 초라한 우리의 몸을 영광으로 변화 시키실 것이다.[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이것이 신앙하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기대요 소망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키시고 희생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3f) 하여 그 아들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가려진 것이 없이 그리스도의 친구로 하나님의 자녀로 새 예루살렘에 영광의 주인공들이 될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이 역사 속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는데 수건이 가려져 있어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려진 수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벗고 맑은 영혼의 눈으로 영광과 생명을 바라보고 누리게 된 것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아직도 수건으로 가려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참여시킬 수 있는 …